이태백→ 88만원 세대→ 이생망… 사회불만 표현 수위 높아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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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語로 본 한국사회]<上> 1992년이후 211개 단어 분석

“방학이 되면 국내파와 해외파 오렌지족이 어울려 사치 퇴폐 행각을 일삼는다. (중략) 종전엔 식당이나 록카페에서 파트너를 물색했는데, 요즘엔 그랜저 승용차 등을 몰고 가다 길가는 여학생 옆에 세워놓고 ‘야, 타라’ 하며….”(동아일보 1994년 1월 22일자)

한국 대중음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신인류(新人類)’가 출현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바로 ‘오렌지족(族)’의 등장이었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1990년대 초반 오렌지족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던 이유는 당시 급격한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비추는 ‘사회적 거울’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렌지족 이후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거울은 어떤 게 있었을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사람·세대를 지칭하는 신어만도 한 해에 수백 개 쏟아진다. 1992∼2016년 동안 산술적으로 수만 개에 이른다. 동아일보는 이 가운데 △포털사이트 시사용어집이나 오픈사전에 등재됐고 △언론 매체에서 최소 10회 이상 사용했던 단어들로 추려봤다. 모두 211개가 기준에 부합했다. 당대 혹은 지금까지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말들을 중심으로 25년 동안 시대를 따라 흐른 신어들을 정리했다.

○ 1990년대=‘응답하라 1992’ 한국 사회의 지각변동

1992년 한 일간지가 명명한 오렌지족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부유한 부모 덕에 분에 넘치는 유흥을 즐기는 20대를 두고 한 언론은 “사회적 치욕”이라고까지 비난했다. 이후 오렌지족의 변형인 ‘야타족’ ‘낑깡족’에 지금의 흙수저와 비슷한 개념인 ‘뚜벅이족’까지 나왔다.

2년 뒤인 1994년 국내에 등장한 ‘X세대’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X제너레이션은 1991년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커플런드의 동명소설에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젊은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 화려한 TV 광고에서 세련된 이미지로 포장된 X세대는 통통 튀는 ‘신세대’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정착했다.

쓰임새는 사뭇 달랐지만 오렌지족과 X세대의 출현은 당대를 1980년대와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가난 탈출이나 군사독재가 시대적 화두였던 이전과 달리 1990년대는 경제적 안정과 민주화가 함께 발흥한 시기”라며 “본격적으로 소비문화가 발흥한 시점에 두 신어가 유행한 건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신인류라 할 ‘386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60년대 출생해 80년대 대학을 다닌 90년대의 30대’를 일컫는 386세대란 용어는 1997년 전후 언론 매체들이 정치판을 분석하며 즐겨 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후 ‘486세대’와 함께, 앞선 4·19세대나 6·3세대와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적 시대상이 반영된 신어였다.

신어들을 보면 1990년대는 낙관과 비관이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던 시기였다. 긍정 혹은 가치중립적 신어(15개)와 부정적 신어(16개)의 비율이 거의 동일했다. 오렌지족조차도 지금 보자면 낭만적 뉘앙스가 짙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신어도 탄생했다. 1997년경 등장한 ‘왕따’였다. 일본의 이지메(イジメ·집단 괴롭힘)가 건너와 최고를 뜻하는 ‘왕∼’과 따돌림이 결합한 이 신어는 점차 과열돼 가던 경쟁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 2000년대=희망과 절망을 양손에 부여잡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은 한국 사회는 21세기 초반 신어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와 함께 ‘월드컵 세대’가 확산됐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추구하는 ‘웰빙족’이 인기를 끌었다. 반면 199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외환위기의 여파도 여전했다. 구조조정 광풍이 불며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에 회사 다니면 도둑) ‘이태백’(20세 태반이 백수) 등 우울한 세태를 반영한 신어도 많았다.

인터넷·모바일 문화가 급속하게 팽창하던 분위기를 담은 신어도 나타났다. 영상채팅의 유행이 만든 ‘얼짱’과 일본 오타쿠(オタク)에서 변형된 ‘(오)덕후’였다. 덕후는 처음엔 ‘사소한 취미에 집착하고 사교성이 부족하다’는 조롱의 뜻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엔 하나의 분야에 정통하다는 뉘앙스로 바뀌며 위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2001년경 본격적으로 쓰인 얼짱은 한국적 외모지상주의의 ‘시조’ 격인 신어다. 초기엔 그저 미남미녀를 지칭하는 단순한 말이었지만, 이후 ‘몸짱’ ‘꿀벅지’ ‘베이글녀’ 등 수많은 유사용어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외모 중시 풍조는 오랜 인간의 본성과 연결되지만 21세기 들어 외모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력한 경쟁력으로 대접받으며 더욱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는 남녀 성역할과 관련된 신어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진 시기이기도 했다. 초중반엔 능력이 출중한 여성들을 일컫는 ‘알파걸’ ‘줌마렐라’ ‘골드미스’ 등 높아진 여성의 지위를 반영한 긍정적 키워드가 많았다. 그러다 2006년 등장한 ‘된장녀’는 이 모든 걸 ‘한 방’에 뒤흔든 신어였다. 허영심을 지닌 일부 여성을 비하하는 이 말은 한국 사회의 격렬한 ‘젠더(사회적 의미의 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시발점이었다. 이후 ‘쩍벌남’ ‘김치녀’ 등 관련 신어가 쏟아지며 현재의 극단적 남성·여성 혐오로까지 번졌다.

○ 2010년대=사회적 불안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최근 신어들은 갈수록 파괴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같은 의미라도 ‘성형미녀’가 아닌 ‘성괴’(성형괴물)로 더 파괴적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신세를 지는 젊은이들을 부른 ‘캥거루족’(1990년대 후반) ‘연어족’도 마찬가지. 다소 조롱의 의미는 있을지언정 평범한 뉘앙스였으나 이 시기엔 ‘빨대족’ ‘등쳐족’(부모 등쳐먹는 족속) 등 공격적으로 변모했다.

계층·계급적 불만을 드러내는 신어들이 쏟아진 것도 눈에 띈다. 물론 이전에도 ‘이태백’과 같은 신어가 존재했다. 그러나 2007년 우석훈 박권일의 책 ‘88만원 세대’ 이후 2010년대엔 ‘n포세대’ ‘헬조선 세대’ 등으로 점점 거세졌다. 지난해 ‘흙수저’ 논쟁이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같은 푸념은 이런 분위기가 더욱 심화됐음을 드러낸다. 권상희 성균관대 교수는 “극심한 청년실업과 더불어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사회적 경직성이 청년세대에게 좌절과 자기비하를 체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된장녀에 이어진 젠더 혐오 논쟁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한남충’(한국 남성은 벌레)이나 ‘아몰랑’(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성) ‘김 여사’(중년여성 비하) ‘개저씨’(개+아저씨) 등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할퀴고 있다. 이런 극단적 충돌은 계층 혐오 등으로 번지며 갈수록 거칠어졌다. 사람을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부류로 비하하는 ‘맘충’(아기 엄마 비하) ‘틀딱충’(노년 비하) 등도 나왔다.

이 시기라고 비관적 신어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반발한 ‘훈남(녀)’ ‘뇌섹남(녀)’이나 시대적 아픔과 정치사회적 성숙을 담은 ‘촛불 세대’ ‘세월호 세대’도 등장했다. 하지만 그 비율은 10개 가운데 7, 8개가 부정적일 정도로 극심하게 기울었다.

남길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어는 당대의 사회 구성원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와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며 “한국 사회에서 부정의 가치가 점점 노골적으로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이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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