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교육열의 선과 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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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열, 오랜 세월 지속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교육의 틀 바뀌어야
서술형 평가 늘려 사고력 갖춘 리더 육성하길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17세기 제주도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 청년 헨드릭 하멜. 요샛말로 이게 웬 횡액인가. 목숨을 부지한 그가 조선에서 13년을 지낸 뒤 귀국하고서 쓴 여행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조선의 아이들은 낮이고 밤이고 책을 읽는다. 아이들이 책을 이해하는 정도는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19세기 말에 강화도에서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군인이자 화가인 장 앙리 쥐베르가 귀국 후에 쓴 여행기에는 ‘이 나라에서는 빈부를 막론하고 집에 책이 있다. 프랑스인으로서 자존심 상한다’는 구절이 있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빠르게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동인으로 흔히 교육열을 든다. 생소한 동방의 나라를 관찰한 외국인의 기록을 보면, 이런 교육열 문화가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우리 DNA에 새겨진 것 같다.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의 내용은 어떤 거였을까. 리더십을 갖춘 소수의 인재는 큰 그림을 보는 능력과 전략적 사고를 갖추어 조직을 키워낸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남이 그린 큰 그림 속에서 퍼즐의 한 조각처럼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자기 몫을 해낸다. 우리 교육은 이런 인재를 길러내며 그 시대에 필요했던 교육의 기능을 잘 수행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20세기 후반부를 강타한 디지털 혁명은 보이지 않는 가상세계에 머물렀지만, 어느새 로봇이나 사물인터넷과 결합하며 실물세계로 들어왔다. 실체가 오리무중이던 인공지능(AI)은 무인자동차나 스마트 공장처럼 만질 수 있는 모습이 됐다.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 주문한 짜장면이 집 식탁에 놓이지 않는가. 가상세계와 실물세계의 이런 결합은 AI 기술의 획기적 발전으로 그 모양과 추세가 거대해져서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린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너무 들떠 보여서일까. ‘실체 없는 수사’라거나 ‘지나쳐 버릴 과장’이라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로봇이든 사물인터넷이든, 따로 놓고 보면 특별히 달라진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가상세계와 실물세계의 연결이라는 거대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고, 예전의 산업혁명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의 생산성 증대를 일으킬 것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다. 일자리의 변화와 새로운 노동시장, 이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까지 보아야 하니, 지금의 호들갑스러운 논의는 어쩌면 길을 찾는 과정으로 보아줄 만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단순반복 업무를 포함한 노동의 상당량을 AI와 결합한 로봇이 수행한다. 말단에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예전의 인재는 그 필요가 적을 수밖에. 그래서 일자리가 요구하는 인재의 소양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리더의 소양으로 여겨지던 전략적 마인드와 기획 능력이 이제는 한참 내려와서 말단 직원에게도 필요한 소양이 됐다. 말단조차도 자신의 전략적 기획을 AI와 로봇을 통해 구현하는 중간 부서장의 모습을 띠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단순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에서,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생각의 힘’을 갖춘 작은 리더들을 길러내는 것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였고 세계 최고의 대학 입학률을 만들어 낸 우리의 교육열이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저항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최근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고입 시기에 상당수의 아이가 적성에 따라 직업학교로 간다. 스위스도 그렇다. 우리 아이들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설정이 다르고, 따라서 학업에 대한 동기가 다르다. 교육 방식의 차이나 교육과정의 양 또는 흥미도 저하에서 답을 찾는다고? 교실에서 학생과 눈을 맞추는 교사의 선의로 해결한다고? 숲은 안 보고 나무만 보는 격이다. 숲은, 그러한 선의가 작동하도록 제도의 변화를 만들라고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실수 없이 풀어야 하는 현 입시의 틀에서, 어떤 학교나 교사도 제자가 손해 보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만들어진 평가 시스템의 벽은 강고하다. 우리 교육열은 이 벽에 강고함을 더하며 당장 필요한 변화를 힘들게 한다. 서술형 평가를 늘리는 것에서 시작하자. 선진국의 선발주자 프리미엄이 사라지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한국 교육열#헨드릭 하멜#인공지능#4차 산업혁명#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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