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엄마 쓰는거 베껴… 賞 타야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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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기념 여주백일장 가보니

 “이리 줘 봐. 엄마가 쓰는 거 잘 보고 그대로 따라 써.”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릉 일대에서 열린 세종 백일장 및 그림 그리기 대회장. 오전 10시 30분 작품 주제 발표를 알리는 징이 울리자 학생들은 왕릉 근처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날 본보 기자가 대회 현장을 두 시간 동안 직접 취재한 결과 초등학생 참가자들 대부분은 부모가 보는 옆에서 원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학생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품을 써주는 것은 규정에 어긋나지만 부모가 자녀의 글을 보며 첨삭을 해주기도 했다. 일부 부모가 아예 원고지와 펜을 들고 직접 글을 써주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대회 시간인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부모는 물론 참가 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대회장을 자유롭게 오갔고 이를 통제하는 대회 관계자는 없었다. 대회를 주최한 한국예총 여주지회 측은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광범위하고 나이 어린 참가자들이 많아 일일이 감독하기가 쉽지 않다”며 부정행위 방지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해 열리는 이 대회는 올해로 19회째로, 초등부 고학년 1등 입상자에게는 여주시장상이 수여된다.

 이날 본보 취재 결과 자녀의 작품을 대신 작성해 준 초등학생 학부모는 30명을 훌쩍 넘었다. 부모들은 자녀의 수상 실적이 ‘스펙’이 된다는 점을 의식해 작품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장에서 자녀의 글을 대신 써주던 한 어머니는 “일부 특수 목적 중학교 등에 입학할 때 초등학교 수상 실적이 반영되기 때문에 엄마들끼리 경쟁이 치열하다. 이 대회처럼 전국 규모일 경우에는 학부모 상당수가 아이와 함께 직접 대회장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1등 입상자에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여하는 고등부의 경우 미리 준비한 작품을 현장에서 몰래 전달하는 방식으로 대필을 하는 등 부정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경찰은 이 대회에 참가했던 고교 2학년생 손모 군이 대리 작성한 작품으로 입상한 사실을 적발하기도 했다. 손 군의 어머니는 현장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원고지에 미리 작성한 작품을 몰래 손 군에게 전달했다. 이 작품들은 당시 현직 국어 교사가 작성해준 것으로 손 군은 대필 작품을 제출해 2등인 금상을 수상했다. 당시 손 군은 이런 방식으로 20여 개 대회에서 입상한 수상 기록을 바탕으로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가 입학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회 주최 측 관계자는 “대필과 관련한 얘기가 몇 년 전부터 나오면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면서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작품을 작성해 출품하는 방식을 바꾸는 방법은 아직 논의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정동연 기자 ca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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