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느 중증 지체장애인이 주차를 하려 했으나 주변에 주차 공간이 전혀 없어 주위를 배회하다가 잠깐 차를 세우고 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주차위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 장애인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을 관할 구청에 알리면 사후에 처리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얼마나 번거로운가. 이럴 경우 한적한 인도에라도 잠깐 주차하면 안 될까. 영국 등에서는 주차 시점을 명시하고 30분간 차도와 인도 모두에 주차할 수 있다.
20대 총선 중에도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어느 후보의 지적장애인 자녀가 대학입시(장애인특례입학) 면접장에서 한 발언을 두고 한 교수가 부정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지적장애인의 특성과 특례입학에 대해 알았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이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덜 위험하며 권리를 더 행사할 수 있는지 섬세하게 고려하는 일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수영을 하려면 어떻게 환경을 바꿔야 할까. 뇌성마비 장애인이 의사소통을 좀 더 잘할 수 있으려면 무슨 장치를 마련해야 하나, 화상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해야 하나, 장애인들은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하나 등등. 수많은 질문을 생활 속에서 던지면서 사회 구성원이 장애인에 대한 섬세함을 훈련해야 한다.
어딘지 모르게 겉도는 장애인 정책은 이러한 섬세함이 부족한 측면이 강하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아토퀘이슨 교수가 저서에서 말하듯 ‘잔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이제 우리 사회가 섬세한 촉수를 들고 각론으로 다가갈 때이다.
이성규 한국장애인재단 이사장 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