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한번에… ‘한국산’이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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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 돌때마다 ‘메이드 인 차이나 →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갈이
동대문 수선가게 단속현장 르포

28일 서울시 특별사법경찰과 서울세관 직원들이 벌인 라벨갈이 단속 현장. 수선 가게에 중국산 옷과 여기에 부착할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이 쌓여 있다.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8일 서울시 특별사법경찰과 서울세관 직원들이 벌인 라벨갈이 단속 현장. 수선 가게에 중국산 옷과 여기에 부착할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이 쌓여 있다.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8일 오후 8시 30분경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 동대문의 한 뒷골목. 길 건너 대형 패션상가에서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지만 이 골목에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뿐이다.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낡은 건물들 안에는 오래된 옷가게와 수선가게가 들어서 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렸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라벨은 모조리 압수해야 합니다. 소유권포기서에 확실히 서명받는 것도 잊지 마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울시 민생경제과 김현기 주무관. 그는 6년 동안 ‘짝퉁’으로 불리는 가짜 명품 단속에 매달려 온 베테랑이다. 동대문 짝퉁업계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꼽힌다. 김 주무관의 말이 떨어지자 나머지 31명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들은 특별사법경찰권을 갖고 있는 서울시, 서울세관 직원으로 구성된 합동단속반이다. 이날 단속 대상은 의류의 ‘원산지 세탁’을 하는 수선가게. 값싼 중국산 의류에 붙은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라벨을 제거하고 가짜 한국산 라벨을 새로 붙이는 이른바 ‘라벨갈이’가 이뤄지는 곳이다.

○ 1분이면 중국산이 한국산으로

원래 붙어 있던 중국산 표기 라벨과 새로 부착하는 한국산 표기 라벨.
원래 붙어 있던 중국산 표기 라벨과 새로 부착하는 한국산 표기 라벨.
32명이 동원된 대규모 단속.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라벨갈이 제품을 적발한 적은 있지만 단속반이 동시에 작업 현장들을 급습하는 건 처음이다. 이들은 팀을 나눠 ‘라벨·포장·수선 전문’ 등이 표시된 점포 10여 곳에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시간차 단속’을 하면 다른 가게들이 증거물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동시다발적 진입이 중요하다.

“모두 작업 멈추고 일어나세요!”

한 단속반원이 외치자 가게 안에 있던 여성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여성들은 재봉틀 다섯 대 앞에서 한창 박음질을 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작업대 위에 있던 옷을 감추기 시작했다. 단속반이 옷을 수거하려 하자 한 여성은 “왜 가지고 가냐”며 붙잡고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증거는 가게 곳곳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원산지 바꿔치기 안 해요.” 주인의 말이 무색하게 1m 높이의 대형 의류상자들 겉면에는 중국산 표기가 큼지막하게 인쇄돼 있었다. 바닥에는 방금 떼어 낸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나뒹굴었다. 재봉틀 옆에 쌓여 있는 새 라벨에는 ‘메이드 인 코리아’ 글자가 선명했다.

라벨갈이 대상은 티셔츠부터 청바지 원피스 등 종류가 다양했다. 중국산 라벨이 한국산으로 바뀌는 데는 1분이면 족했다. 처음 제조 때부터 아예 라벨갈이를 염두에 둔 정황도 포착됐다. 이날 현장에서 확인한 의류 상당수는 손으로 살짝 잡아당겨도 중국산 라벨이 쉽게 떨어졌다. 뒤늦게 잘못을 인정한 주인 A 씨(57·여)는 “라벨 한 개 바꿀 때 받는 돈이 많아야 100원이다. 워낙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 라벨갈이 거친 의류 가격 10배 ‘뻥튀기’

이날 합동단속은 3시간 가까이 동문시장 일대에서 진행됐다. 동대문 지역에만 이런 라벨갈이 전문 업소가 수십 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 경기 부천시의 의류공단 등에서도 이런 원산지 세탁이 이뤄지는 것으로 서울시는 파악하고 있다.

업소들은 원산지 세탁 범죄의 중간 단계에 있다. 단속의 최종 목표는 라벨갈이를 맡긴 ‘의뢰인’. 대부분 의류 도매업자다. 값싼 중국산 의류를 수입해 한국산으로 라벨을 바꾼 후 가격을 뻥튀기해 내다 판다. 대외무역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다.

라벨갈이 의류를 소비자들이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렵다. 원산지가 뒤바뀐 옷이 시중에 얼마나 유통됐는지는 추산조차 안 된다. 김 주무관은 “이렇게 라벨갈이를 거친 의류는 보통 10배씩 가격을 부풀리는 경우가 많다”며 “보세 옷가게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마트나 홈쇼핑 등에도 유통되는 것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재봉틀#중국산#도매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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