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매너’에 대한 어르신들 생각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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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갈등 푸는 노인의 품격]<中>어른들의 속마음 들어보니
“귀 잘 안들려 목소리 커지는 것”… 입장 바꿔보면 끄덕끄덕

《 노인 세대 대상 심층 인터뷰를 통해 ‘매너 노인’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었다. 마음은 매너를 지키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81세 할머니는 “다리가 아픈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다. 잠시라도 앉지 않으면 힘들다”고, 팔순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목소리를 크게 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장유유서가 제1의 가치인 줄만 알았지 21세기 ‘매너 노인’ 교육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노인층도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맞춰야겠지만 젊은 세대도 노인 세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진단이다. 》

10월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에서 경기 의정부시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 열차. 노약자석이 가득 찬 상태에서 한 노인이 일반석에 앉은 20대 남성의 머리를 우산으로 내리쳤다. 머리를 맞은 최모 씨(22)는 그 자리에서 노인 이모 씨(73)를 경찰에 신고했고 이 씨는 동묘앞 역에서 붙잡혔다.

경찰 조사에서 이 씨는 “자리를 양보 안 하는 젊은것이 싸가지가 없어 때렸다”고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지하철에 “어른이 서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야지”라고 고함치다 최 씨가 쳐다보자 “뭘 째려보느냐”며 우산으로 때렸다. 최 씨는 이런 이 씨의 폭행에 대응하지 않고 바로 신고했고 합의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씨는 폭행 혐의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는 ‘싸가지 없는 젊은것은 때려도 된다’고 보는 노인 세대의 가치관과 오히려 이런 생각이 문제라고 보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본보 취재진은 노인과 전문가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들은 매너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고 살아온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은 연령이 권위를 갖는 시대가 지났는데도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식이 갈등을 만들고 있다며 젊은 세대도 노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니까…”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관악구 강남구 일대에서 노인 35명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부분 매너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 낯설다고 털어놓았다. 이기범 씨(77)는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말만 들었지 줄서기처럼 서양식 교육은 따로 받아본 적이 없다”며 “할아버지들은 밖에 많이 나갈 일도 없으니 배울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다. 손인철 씨(80)는 “예전 교육에선 윗사람이 항상 먼저였는데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노인들은 배려하지 않고 다 일렬로 서 버리는 게 질서라고 한다. 평생 장유유서로 예절교육을 배운 노인들에겐 그런 게 와 닿지 않는다”고 했다.

신체적 제약 때문에 젊은이들을 배려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김모 씨(81·여)는 “우리들은 뿌리 없는 나무다. 할머니들 중에 다리수술 안 한 사람이 있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서 있으면 쓰러질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김옥심 씨(84·여)도 “내가 봐도 할머니들이 막 제치고 앞서 나가려 할 땐 민망하지만 나이가 들면 나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말을 한다는 지적에 대해 김형인 씨(80)는 “귀가 먹어 이야기를 크게 할 수밖에 없는데 젊은 사람들이 핀잔을 주는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물건을 사러 가도 잘 설명해주지 않고 자기들 하는 식으로 해버리니까 자책감과 소외감이 든다”고 덧붙였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영숙 씨(81·여)는 “옛날엔 못 먹고 살았으니 무조건 빨리 가야 먹을 것도 가져올 수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빨리빨리’ 근성이 남아 있다”고 했다. 박면종 씨(77)도 “전쟁 때 애를 많이 낳아 형제가 많다 보니 뺏기는 걸 싫어한다”며 “그러다 보니 행동도 빨라지고 자리 하나라도 남으면 먼저 앉으려고 한다”고 했다.

굴곡진 현대사를 겪은 노인들이 보상심리 때문에 난폭한 행동을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현규 씨(85)는 “6·25전쟁, 월남전에 다 참전하고 대동아전쟁까지 겪었다”며 “내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가유공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며 “그것만으로 예우를 받으려는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했다.

노인부터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용혁 씨(75)는 예의범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며 “요즘 시대에 줄을 서서 공공장소에 들어가는 게 예의라면 따라야 한다. 노인들도 젊은 시절이 있지 않았나”라고 했다.

○ 부모와 생활한 젊은 세대… 노인 이해 노력해야

전문가들은 핵가족화로 젊은 세대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게 됐지만 노인들은 주로 대가족을 이루며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부모와 떨어져 생활한 젊은 세대들이 노인의 가치관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여론조사에서도 가족 구성이 2대인 응답자의 58%가 우리 사회의 노인 세대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본 반면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대가족 구성원은 52.2%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본인의 능력과 역량으로 개인적 가치관이 중시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는 사회가 진보하면서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인들은 나이를 기준으로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고, 젊은 세대는 이를 이해하기 전에 반발심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존댓말이 없는 영어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연장자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경향도 있다. 서양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화하고 싶지만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어른 앞에서 말버르장머리하고는…”이란 말을 쉽게 듣는 풍조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과거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노인들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김형래 시니어 파트너즈 상무는 “이 세대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부 노인들이 권위적 행동으로 보상받으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의 결론은 세대 간 서로를 이해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중교통 노약자석을 젊은 세대는 ‘사회적인 선의’라고 생각하지만 노인들은 ‘당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사회질서에 대해 세대 간 합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경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령사회연구센터장은 “젊은 세대가 다른 연령보다 유독 노인이 튀는 행동을 했을 때 부정적 태도를 갖는 측면이 있다”며 “시니어 매너 교육도 좋은 시도지만 젊은 세대에도 노인에 대해 이해를 증진시키는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민 kimmin@donga.com·박훈상 기자
#노인#매너#세대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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