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덮칠 순간… 40여명 앞에 ‘생명의 사다리’가 나타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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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상가 화재 현장의 의인

1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고층건물 화재 현장에서 신기종 씨가 구조작업이 벌어졌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성남=남경현 기자 biblus@donga.com
1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고층건물 화재 현장에서 신기종 씨가 구조작업이 벌어졌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성남=남경현 기자 biblus@donga.com
11일 발생한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고층빌딩 화재는 올해 초 5명의 사망자와 12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의정부 아파트 화재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지만 한 명의 사망자 없이 건물 안에 있던 340여 명은 모두 무사히 대피했다. 화재 당시 적극적으로 대피를 도운 시민, 규정을 지킨 방화시설, 그리고 발 빠른 현장 응급조치 등 ‘3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날 오후 8시 15분경 분당구 판교로 A오피스텔(197실)의 주민자치위원장인 신기종 씨(58)는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폐지 분리수거를 하고 있었다. A오피스텔은 불이 난 고층빌딩의 바로 옆에 있다. 이때 입주자 한 명이 “불이 났다”고 다급히 외쳤다. 옆 건물 1층 창문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건물 앞으로 달려간 신 씨는 휴대전화로 119에 신고했다. 그사이 불은 건물 외벽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외벽 일부가 불에 약한 ‘드라이비트(dryvit)’ 공법으로 시공됐기 때문이다. 이는 우레탄폼이나 스티로폼을 붙인 뒤 시멘트 모르타르 등을 바르는 것으로 의정부 아파트 외벽과 같은 공법이다.

다급해진 신 씨는 오피스텔 직원에게 대피방송을 지시했다. 3, 4분 뒤 청년 한 명이 그에게 와 “사람들이 건물 안에 갇혀 있으니 사다리를 구해 달라”고 외쳤다. 신 씨는 시민들과 함께 사다리 3개를 챙겨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건물 옆으로 갔다. 2층에는 직장인 30여 명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1층으로 대피하지 못한 입주업체 직원들이었다. 신 씨 등은 2층 창문에 사다리를 걸어 이들의 대피를 도왔다. 잠시 후 3층에 갇혀 있던 다른 10여 명도 신 씨 등 시민과 출동한 소방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13일 기자와 만난 신 씨는 “정말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모두 침착하게 움직여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2층 학원에 있던 강사들의 차분한 대응도 한몫했다. 수학전문학원인 이곳에는 당시 학생 강사 등 290여 명이 있었다. 10여 명의 강사는 불이 나자 곧바로 학생들에게 젖은 손수건이나 휴지로 입과 코를 막게 했다. 이어 전기가 나간 복도에서 비상 손전등과 휴대전화 불빛을 비추며 학생들의 피난을 도왔다. 불길과 연기로 1층 현관이 가로막히자 지하주차장으로 대피를 유도했고 한 여성 강사가 소방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학생들은 소방관의 지시에 따라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지하주차장 입구를 통해 모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불이 난 건물은 건물 복도와 피난계단 사이에 전실(이격 공간)을 두고 양쪽에 이중 방화문이 있다. 분당소방서 관계자는 “건물 외벽과 달리 내부의 피해가 크지 않은 이유는 평소 규정대로 방화문이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의정부 아파트 화재 때는 소방차가 신고 후 6분 만에 도착하고도 주정차 차량에 막혀 진화가 늦어졌다. 이번에는 5분 만에 도착해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자체적으로 수립한 지역사회 응급재난 대응 매뉴얼에 따라 현장에 재난의료지원팀을 급파하고, 병원 로비에는 곧바로 임시병상 수십 개를 설치했다.

이번 화재는 1층 주차장 천장에 있는 전선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최초로 발화한 것으로 잠정 조사됐다. 경찰은 드라이비트 공법의 적법성 여부도 확인할 계획이다.

성남=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분당 상가 화재#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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