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높이 날다]68년 전통과 비전…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우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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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설립 배경

넓은 캠퍼스를 자랑하는 영남대 전경. 학생과 교직원들은 세계를 품는 자세로 교학상장을 실천한다.
넓은 캠퍼스를 자랑하는 영남대 전경. 학생과 교직원들은 세계를 품는 자세로 교학상장을 실천한다.


영남대 박물관 2층에는 ‘영남대 역사관’이 조성되고 있다. 내년 3월 개관하는 역사관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영남대의 68년 전통과 발전 비전, 교직원 및 동문의 활동을 담는다.

대학 설립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영남대의 경우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영남대는 대구 경북에 있던 두 대학(1947년 개교한 대구대, 1950년 개교한 청구대)을 1967년 통합하면서 설립됐다.

이 과정에 당시 청구대 교수였던 노산 이은상(1982년 작고) 선생, 이병철 삼성 회장, 박정희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노산은 영남대가 두 대학을 통합해 새롭게 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들어 재정난 등에 시달리던 청구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재단을 맡을 인사를 찾지 못하자 최후의 방법으로 청와대 문을 두드린 것이다. 노산은 박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몇 차례 집필했고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장을 맡은 인연이 있었다. 당시 대구대(현재의 대구대학교와 다름)는 이병철 회장이 재단 이사장이었다.



노산은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대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 사실은 다음 날 주요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경쟁 관계였던 대구대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이병철 회장을 찾았다. 당시(1965년) 삼성은 성균관대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어 대구대를 지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삼성이 계열사로 울산에 세운 한국비료공업에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이 발생한 이후 삼성과 대구대의 관계도 끊어진 상태였다. 이 회장은 청와대에 대구대 운영이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비료를 통해 대구대를 지원할 계획이 있었으나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한 상태여서 대학 운영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부가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를 통해 대구대를 지원하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청구대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가 두 대학을 지원하면 어느 쪽도 제대로 발전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노산은 두 대학을 통합해 종합대학으로 만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통합을 추진했다.



1967년 8월 두 대학 이사들은 서울에 모여 통합을 논의했다. 그해 12월 16일 두 대학이 통합하고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설립됐다. ‘영남대’라는 이름은 노산이 지었다. ‘대구’ ‘부산’ ‘경북’보다는 영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뜻을 담았다. 노산은 ‘보라, 여기 신라의 옛 땅, 민족의 혼이 살아 뛰는 곳…’으로 시작되는 영남대 교가도 노산이 지었다. 영남대를 상징하는 22층짜리 중앙도서관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영남대의 역사와 발전을 위해 1974년 건립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영남대 설립자가 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영남학원 법인 정관 1조에는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설립자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영남대는 2009년 박정희리더십연구원을, 2011년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을 열었다.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은 45개국 유학생들이 새마을운동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대학원으로 성장했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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