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제정 촉구”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눈물의 삭발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8일 16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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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이라는 곳은 입소하자마자 군대처럼 머리를 빡빡 깎는 곳입니다. 이분들에게 머리를 민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때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28일 오전 11시 20분경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이 연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및 피해생존자 삭발식’에서 사회자가 이같이 말하자 피해 생존자 11명이 눈을 꼭 감았다. 이들은 삭발을 하기 위해 몸에 하얀색 천을 두르고 의자에 앉았다.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며 애써 울음을 참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발단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내무부 훈령으로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을 제정했고, 민간 복지원에 ‘부랑인’ 수용 인원에 따라 보조금을 줬다. 부산에 있던 형제복지원은 어린이, 무연고자 등을 데려와 강제로 수용한 뒤 중노동과 가혹행위를 시켰고 암매장까지 했다. 복지원에 수용된 인원은 최대 3146명에 이르렀고, 시설이 폐쇄된 1987년까지 5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원장 박모 씨는 고작 징역 2년 6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형제복지원에 1981년 수용된 피해자 김대우 씨(44)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시 집도 있고 부모님도 계셨다. 저녁에 잠시 밖에 나왔는데 어떤 아저씨들이 차에 태워 끌고 갔다”며 울먹이며 증언했다. “끌려가면서 ‘도와주세요’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끌려가서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아십니까? 거기선 나올 방법이 아예 없었습니다.”

1983년 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피해자 박순이 씨(44·여)도 이날 삭발에 참여한 뒤 울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 씨는 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이후 ‘83-3038’이라는 수용번호를 부여받고 갇혀 살다가 3년 뒤 겨우 탈출했다.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혹시 우리 딸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현관문을 수시로 확인하며, TV를 켜놔야 겨우 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감금 속에 자유를 뺏기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동안 묻혀 있다가 원장 박 씨 일가가 운영하는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 대출받아 일부를 횡령하거나 유용한 사실이 드러난 2012년 재점화됐다.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54명의 의원은 이 사건의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 등을 위해 지난해 7월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피해 생존자들은 이달 안행위에서 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유야무야돼 19대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못할 것 같다는 위기감에 삭발을 결의했다.

형제복지원에 1984년 잡혀간 한종선 씨(39)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원실을 돌아다니며 읍소하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아무리 간청을 해도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며 오열했다. 안행위 여당 간사인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 측은 “중요한 법인만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고 정부의 입장도 중요한데, 아직 부처간 협의와 관련 준비가 덜 된 상태다. 4월 임시국회에선 (통과가) 어려운데, 다음 임시국회에서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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