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 열정 울분 공존하는 광화문… 온몸으로 함께해 온 東亞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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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95주년][東亞 이야기/격동의 한국역사 지킴이]

새잎에 맺힌 깨끗한 물방울에 ‘동아일보’ 제호가 선명하게 비쳤다. 작은 물방울을 마이크로렌즈로 촬영한 것처럼 동아일보는 세상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감시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청와대가 잘 보이는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노란색 6층 건물이 있다. 지금은 세종대로 사거리의 고층 건물들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키 작은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지만 1926년 12월 10일 완공됐을 땐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를 마주하면서 민족의 기상을 보여 주는 의미까지 갖고 있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옛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 이야기다. 》

1926년 12월 준공된 동아일보 옛 사옥. 1992년까지 이곳에서 동아일보를 제작했으며 현재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1926년 12월 준공된 동아일보 옛 사옥. 1992년까지 이곳에서 동아일보를 제작했으며 현재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 “조선총독부를 감시해야 한다”

완공 당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완성된 이 건물은 1920년대 고층(高層)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현관은 대리석을 사용했고, 외벽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석재와 화장타일로 마감했으며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기와처럼 만든 건축용 도기)로 장식했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돌림띠를 둘러 멋을 냈다.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은 “조선총독부에 맞서,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고 이런 인촌의 생각이 반영돼 세종대로 사거리에 사옥을 세웠다. 지금은 광화문(光化門)만 남아 있지만, 광화문 바로 뒤에는 1995년까지 옛 조선총독부 건물(광복 뒤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이 서 있었다. 마치 조선을 압박하고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동아일보 이 사옥은 19년간 일제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총독부 건물이 광복 후 중앙청으로 사용될 때는 그곳에서 우리나라 제헌국회가 열리고 건국이 선포된 장면을 지켜봤다. 6·25전쟁의 비극, 서울 수복 후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굴곡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느끼는 현장에 서 있었다.

1995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의 고유문 낭독으로 식은 시작되었다. 첨탑 주변과 건물 옥상에서 폭죽과 불꽃이 터지며 흰 연기가 첨탑 주변을 감싸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330t급 대형 하이드로 크레인에 의해 중앙 돔 상부 첨탑이 아래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높이 4.5m, 무게 11.4t의 첨탑이 공중을 서서히 선회해 국립중앙박물관 서편 광장에 마련된 보관대에 안착하는 순간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광복절 중앙경축식 행사를 참관한 광복회원, 해외동포, 시민 등 5만여 명은 첨탑이 철거되는 순간 감격의 탄성을 질렀다. 역사의 현장을 가까이서 보겠다며, 또 자녀들에게 역사교육을 하겠다며 찾은 시민들로 광화문 일대가 가득 찼을 정도다.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준결승전이 끝난 직후 180만여 명의 군중이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동아일보DB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준결승전이 끝난 직후 180만여 명의 군중이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동아일보DB
○ 손기정 승전보부터 2002 월드컵 함성까지

한민족의 역동성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함성을 두 귀로 들은 곳도 세종대로 사거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한국 축구팀의 마술은 놀라웠다.

승전고가 계속 들릴수록 거리의 응원전은 더욱 뜨거워졌다. 경기가 있던 날마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를 휘감은 사람들로 장관을 이뤘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월드컵 기간 중 서울시청 앞과 동아일보 사옥 일대에 모인 인파는 총 800만 명. 건물 위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D플래시’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며 지르는 기쁨의 소리가 거리를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하지만 무질서는 없었다. 사람들은 구획을 나눠 질서정연하게 앉았고, 안전사고도 없었다.

이후로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때마다 사람들은 약속한 듯이 붉은 옷을 입고 광화문 일대를 찾았다. 기쁨과 환호의 장소로 이곳에 모인 것이 2002년이 처음인 줄 안다면 오산이다. 1936년 8월 9일에도 그러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실황을 중계한 라디오의 녹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孫) 1등, 손(孫) 1등. 당당히 일본의 마라톤이 우승했습니다. 수십만 관중의 박수를 들어 보십시오. 히노마루여, 메인 스타디움 높이 날려라.”

당시 일장기를 가슴에 품고 달려야만 했던 손기정 선수의 우승은 한민족의 설움, 그리고 기쁨을 북받쳐 오르게 했다. 조선인들은 터질 것 같은 그 마음을 나누고 싶어 뛰어서 광화문 일대로 향했다.

“광화문 본사 앞 광장을 꽉 에워싼 수백 명의 우산 쓴 관중은 방송이 끝나자 만세를 연창, 광화문통 네거리의 적막을 깨트리고 손기정 군 만세, 조선 만세를 쉴 새 없이 부르더니 약 한 시에도 헤어질 줄을 몰랐다.”(1936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

○ 촛불시위에서부터 1인시위까지

때로는 분노한 민심의 성토장이기도 했다.

“거리 촛불행진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지난달 31일 청와대를 1km 앞둔 최종 저지선이 시위대에 뚫렸다. 집회는 이튿날까지 계속돼 1일에는 시위대가 낮부터 거리행진을 벌이며 두 차례나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다. 주말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에는 이틀간 6만여 명(경찰 추산)이 참가했다.”(2008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당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다. 이후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고 야당이 가세하면서 정권 퇴진 주장까지 나왔다.

아픔을 호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 7월부터 유가족들은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고 국민의 관심과 정치권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에서는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단발적인 잠깐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기업과 관공서 언론사가 몰려 있는 탓이다. 오가는 이들도 정부 부처 공무원이나 언론인이 많다 보니 이곳에서 시위하는 건 다른 어느 곳보다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점심시간에 사거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목에 패널을 걸기도 하고, 전단을 나눠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비정규직 차별 폐지를 호소하거나 일방적인 해고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다.

○ 평화에서부터 통일까지

세종대로 사거리는 평화를 외치는 자리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일정 중 최대 행사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복미사에 참석한 신자와 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줬다. 오전 9시경 교황을 태운 차량이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 인근에 나타났다. 경찰은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주변을 4.5km 길이의 방호벽으로 둘러쌌지만 인파가 교황을 보기 위해 한꺼번에 움직일 경우 서로 엉켜 쓰러지는 등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와 시민들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교황의 차량을 향해 다른 사람을 밀치며 뛰쳐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비바, 파파’를 외치며 열광했다. 어르신과 아이들, 수녀가 교황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배정받은 구역 내에서 자리를 바꾸는 배려를 보여 주기도 했다.”(2014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

1992년까지 신문을 실제로 찍어 내던 옛 사옥은 1994년 일민문화관으로 개관한 뒤, 1997년에는 일민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옛 사옥 옆에는 1999년 12월 30일 완공된 동아미디어센터가 있다. 현재 신문은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제작한다. 89년간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동아일보는 조선인 한국인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새로운 100년이 시작돼도 이런 노력에는 변함이 없을 게 틀림없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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