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샘물]‘행복의 집’을 눈물짓게 한 영혼없는 행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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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샘물·사회부
이샘물·사회부
“이건 진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서울 용산구의 장애인 거주시설 ‘행복의 집’이 이삿날 길거리에 나앉은 사연(본보 25일자 A12면 참조 )을 취재한 24일 저녁, 정진석 행복의집 원장(68)은 이렇게 말하며 흐느꼈다. 취재가 시작되자 용산구가 집 계약 마무리에 나서면서 이날 장애인들이 새집에 입주하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는 해외로 출국한 집주인이 돌아온 뒤인 다음 주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기자가 용산구에 이번 사안의 경위를 물은 이날 오전만 해도 구청 관계자는 “전세권 등기설정이 돼야 돈을 입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후엔 “일단 오늘 저녁에 계약서를 쓰고 돈을 입금하기로 했다. 전세권 등기설정은 다음 주에 할 텐데, 이를 계약서에 명시하기로 했다”며 태도가 달라졌다. 방법이 없었던 건지 관심이 없었던 건지 의문이다.

행복의 집 이삿날인 23일 저녁, 새집 앞은 이삿짐이 쌓여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원장 부부는 짐을 지키느라 1t 트럭을 세워놓고 밤새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기자가 구청에 문의했을 때 돌아온 말은 “일단 저희가 반드시 (전세금을) 입금해야 하는 건 아니고 (입금할지 말지는) 저희 재량”이라는 것이었다. 용산구의 판단에 따라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산구는 일이 잘못된 데 대해서도 원장의 일처리 미숙을 탓했다.

하지만 행복의 집 전세금 1억6000만 원 중 1억4000만 원은 용산구가 복권기금을 통해 지원한 금액이다. 행정당국이 조금만 더 책임감과 관심을 갖고 챙겼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용산구는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은 맞다”고 인정하고 뒤늦게 대책을 세웠다.

당초 무심했던 용산구는 24일 저녁에 직원을 보내 곧장 계약을 마무리하고, 행복의 집에 “고생 많았다”며 격려까지 해줬다고 한다. 언론이 취재에 나선 뒤에야 장애인들의 사정을 살펴본 셈이다. 정 원장은 기자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감사 인사를 받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청난 부정부패나 불합리한 제도가 어려운 처지의 정 원장을 괴롭힌 게 아니라 아주 작은 관심이 없어서 빚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해결될 일을 그저 팔짱만 끼고 ‘남’으로 여기는 공무원의 자세가 아쉽기만 하다. 공무원의 팔짱이 잠시 풀렸다 다시 꼬여 또 다른 사달이 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샘물·사회부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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