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핑계 없는 살인범 없다”… 그놈과의 치열한 두뇌싸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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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檢 과학수사담당관-심리행동분석관은?

대검찰청 심리분석관이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대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 심리분석실에서 전국 25개 지검 지청의 심리·행동분석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살인범은 대검 분석관들이 직접 만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진술의 진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유영철, 김길태, 오원춘 등 흉악 살인범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대검찰청 심리분석관이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대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 심리분석실에서 전국 25개 지검 지청의 심리·행동분석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살인범은 대검 분석관들이 직접 만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진술의 진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유영철, 김길태, 오원춘 등 흉악 살인범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죽인 비정한 가장’, ‘집에 불 질러 일가족을 살해한 이웃집 아줌마’, ‘내연녀를 토막 내 시신을 곳곳에 버린 중국동포’, ‘남편과 내연남을 죽여 고무통에 쑤셔 넣어 둔 중년 여성…’

최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다. 이런 흉악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반드시 한번은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담당관과 심리·행동분석관이다. 이들은 2, 3일 동안 작은 방에서 범인과 일대일로 마주앉아 치열한 심리전을 벌인다. 범인의 말 한마디와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살펴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검찰은 과학수사기획관이 총괄하는 대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를 검사장급이 이끄는 과학수사부로 승격시켜 과학 수사에 힘을 실어 줄 방침이다.

살인범에게 멱살 잡힌 크리스마스이브


“선생은 사람 죽여 봤습니까?”

토막 살인범 A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검 5층 심리분석실에서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마주 앉은 대검 과학수사담당관실 심리분석관이 “토막 낸 시신을 숨겨 둔 장소가 기억 안 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연신 되묻자 발끈한 것이다. A는 “사람을 죽이면 당황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범행 수법과 시신 유기 장소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A는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낸 뒤 내다 버린 혐의를 받고 있었다. 시신을 토막 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다투는 과정에서 멱살을 잡고 내팽개쳤더니 어느새 죽었던 것이지 고의로 목 졸라 죽인 게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토막 낸 시신 중 일부는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진술했다.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뜻하지 않게 죽였다고 해야 형량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거란 계산에서다.

A의 말을 가만히 듣던 검찰 행동분석관은 당시 행동을 재연해 보라고 했다. A는 잠시 주춤하더니 분석관의 멱살을 붙잡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다소 통증이 있긴 했지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이 행동분석관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살인범에게 멱살 잡힌 기분이 참 묘하더라”며 “(A가) 재연하는 행동이 어색했고 이후에도 무안해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A는 중학교를 중퇴했지만 검사 결과 지능이 평균 이상으로 높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모두 기억이 안 난다고 버티다가 증거를 들이밀면 시인하는 식이었다. 경찰에 체포됐을 때는 내연녀의 이름을 듣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A는 심리분석 과정에서 “죽은 사람에게 미안하다. 나도 기억을 되살려 시신을 꼭 찾아주고 싶은데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면서도 최면수사와 심리생리검사를 제안하자 “의자가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거부했다.

A는 생체 측정을 하지 않고 설문 등을 작성하는 임상심리평가에는 웃으면서 응했다. 검사 결과 A는 대인관계 시 상대방을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보고 피상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못할 인지적 결함이나 판단 장애는 없었다. 신성식 대검 과학수사담당관은 A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분리해 유기했다고 판단된다는 통합심리분석결과를 수사팀에 통보했다. 검찰은 A를 살인 및 시체 훼손, 시체 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대검 심리분석관이 흔히 거짓말탐지기라 불리는 심리생리검사를 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범인의 상반신에는 두 줄의 호흡 측정 튜브를 채우고 손가락에는 맥박과 땀 등을 측정하는 도구를 채운다. 의자에는 전신의 미세한 움직임을 측정하는 피부전도반응 센서가 곳곳에 달려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대검 심리분석관이 흔히 거짓말탐지기라 불리는 심리생리검사를 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범인의 상반신에는 두 줄의 호흡 측정 튜브를 채우고 손가락에는 맥박과 땀 등을 측정하는 도구를 채운다. 의자에는 전신의 미세한 움직임을 측정하는 피부전도반응 센서가 곳곳에 달려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모든 살인범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인들은 대부분 ‘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치부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검찰은 진정한 의미의 사이코패스 범죄를 ‘범행을 숨기려는 의도 없이 다수가 보는 앞에서 아무 이해관계 없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저지르는 살인’으로 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살인범은 치정이나 원한, 금전 관계 등 뚜렷한 동기나 이해관계 아래 치밀한 계획을 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그 동기를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이유 없는 ‘묻지 마 살인’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고급 아파트에서 아내와 두 딸을 연이어 목 졸라 죽인 가장 B의 사건에서 드러난 범행 동기는 대부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식 투자 실패와 실직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건데, 당시 B는 서초동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수억 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 담당관과 분석관들은 지난달 22, 23일 대검 심리분석실에서 B를 정밀 조사했다. B는 분석 과정에서 대뜸 종이에 ‘부+명예+여자=완벽한 남성상’이라고 적었다. ‘나만의 개똥철학’이라며 “좋은 일은 알리고 나쁜 일은 혼자 안고 살아 왔다”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지인들에게 나쁜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하거나 상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실직하고도 양복을 입고 고시원으로 출근하면서 주식에 손을 댔다가 그마저 실패해 극도의 좌절감을 맛봤지만 가족에게조차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B의 부모도 부유한 편이지만 한번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다.

B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유명 외국계 기업 등에서 억대 연봉을 받아 온 엘리트지만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자 극단적인 마음을 먹었다. 원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남겨진 가족이 경제적으로 불행해질 거란 확신에 가족을 먼저 죽였다고 진술했다. 지금까지 최고급으로 교육받은 자녀들이 자신의 죽음 이후 해외 유학도 못 가고 하층민으로 살 걸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B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20세기에만 유효할 뿐이다. 앞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절대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B는 가족을 직접 죽였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진술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말한 뒤에 “아이고 의미 없다∼”라며 한 개그 프로그램 유행어를 따라 할 만큼 여유도 있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놨으니 솔직하게 다 얘기하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조사 마지막에는 “내가 ○○○(이름)이 맞는데 그 사람은 1월 6일에 죽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육신만 있지 다른 사람”이라며 오열했다.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범도 결국 사람이었다.

심리·행동분석 결과 B의 진술은 사실로 판정됐다. 검사 결과 지능은 상위 0.1% 수준으로 아주 높았다. 내면에는 상당한 무력감과 억압된 분노가 쌓인 것으로 관찰됐다. 대검 심리분석관은 “일반인의 시각에선 이해되지 않아도 모든 살인범은 자기만의 분명한 동기가 있다”고 말했다.

아내 죽어 슬프다는 남편, 우울감은 극히 낮아

대검 과학수사담당관은 물증이 있는데도 범행을 부인하거나 엇갈린 진술을 하는 살인범에 대해 수사 검사 의뢰를 거쳐 통합심리분석을 시작한다. 통합심리분석은 심리생리검사와 행동분석, 임상심리평가로 나뉜다.

‘거짓말탐지기’와 유사한 심리생리검사는 혈압과 호흡, 맥박, 손의 땀, 피부 전도 반응 등을 매순간 측정하는 센서를 통해 진술의 신빙성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행동분석에선 분석관과 범인이 탁자 없이 의자에 마주 앉아 2시간 정도 대화한다. 범인에게 신체 측정 장비도 채우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데, 표정 변화부터 눈 근육 움직임까지 모든 단서를 포착하는 시간이다. 일부 살인범은 행동분석과 심리생리검사 때 일부러 특정 진술 시 몸을 움직이는 식으로 신체 반응을 유도하면서 결과를 왜곡하려고도 하지만 이미 그런 움직임까지 여러 차례 경험한 ‘백전노장’의 분석팀에는 통하지 않는다.

임상심리평가는 범인이 범죄에 대한 기억 부재나 고의성 부정, 정신이상 등을 호소할 때 진위를 가려 준다. 100억 원에 가까운 보험금을 노리고 외국인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차량 조수석에 태워 운전하던 남편이 화물차를 고의로 들이받아 아내를 죽인 혐의로 구속돼 임상심리평가를 받았다. 이 남성은 “고생했던 아내가 우연한 사고로 죽게 돼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슬퍼했지만 평가 결과 정상 성인에 비해 우울감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술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는 의미다.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인 적이 없다는 진술도 거짓으로 판정됐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분석관

대검 과학수사담당관과 분석관들은 늘 범인의 언행을 예의 주시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다. 다중인격자라는 게 입증되면 무죄를 선고받을 수도 있기에 범인 대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우발적으로 죽였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식의 핑계를 대며 최대한 형기를 줄이려 애쓴다. 부산 여중생 살인 사건 범인 김길태는 검찰에서 “내 안에 악마가 있는데 통제가 안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가 사람을 죽였다”며 ‘빙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의 진위를 과학적으로 판단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과장하여 동정심을 사려는 살인범도 많다. 지난해 12월 말 강원도에서 2780만 원의 빚 때문에 일가족 4명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집에 불을 질러 죽인 중년 여성은 심리분석 과정에서 “임신했을 때 전 남편에게 맞아 뇌성마비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비하하는 말을 듣고 욱하는 마음에 범행했다”며 “구속되면 아들을 봐 줄 사람이 없다”고 호소했다. 울음을 짜내려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발적으로 범행했다는 진술은 분석 결과 거짓으로 판정됐다.

일부 범인은 아예 감형을 포기하고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 없이 뻔뻔하게 굴어 분석관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한다. 이런 흉악범들은 대부분 피해자와 불합리한 사회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 죄의식도 별로 없다. 한 분석관은 “한 범인이 의자에 양반다리로 앉아서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라면서 웃을 때 나도 사람이다 보니 피가 거꾸로 솟더라”라고 말했다.

대검 분석관들은 살인 사건뿐 아니라 국가정보원 증거 조작 사건, 전남 완도군 섬마을 선생님 성추행 사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낸 과학 수사 인재들이다. 이 중 진술분석관은 대부분 관련 분야 석·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만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하고 기간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검찰은 공무원 인력을 총괄하는 행정자치부에 이들을 정규직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부처 간 경쟁이 심해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신 담당관은 “분석관들은 과학수사 발전을 위한 필수 인력이지만 대우가 좋은 편이 아니라 사명감 없이는 일하기 쉽지 않다”며 “처우를 개선해 유능한 인재를 더 많이 영입해야 과학수사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심리전#살인#과학수사#심리행동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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