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철화무늬 도자기엔 자유분방함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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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쓱∼ 붓질 몇번 하니 풀-물고기 담긴 ‘한편의 추상화’ 탄생

백자철화끈무늬병
백자철화끈무늬병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
단순한 듯하지만 볼수록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보고 돌아서면 또 보고 싶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가 돌지요.

국립중앙박물관 도자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 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조선 15∼16세기). 표면 장식을 보면, 목을 휘감은 뒤 몸통을 타고 비스듬하게 흘러내려간 흑갈색 끈 무늬 하나뿐 아무런 장식이 없습니다. 끈 무늬의 선은 반듯한 것이 아니라 삐뚤삐뚤하네요. 그런데 이 무늬는 마치 병에 묶어 놓은 실제 끈 같아 보이지 않나요? 이 백자 병에 술을 넣어 마시다 술이 남으면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의미에서 끈을 그려 넣은 것 아닐까요?

이 백자철화끈무늬병은 옛 사람들의 재치와 해학이 돋보이는 명품입니다. 특별한 꾸밈없이 쓱 그려 내려간 선 하나에 15세기 조선 도공의 익살과 여유,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잘 드러나 있지요. 전체적으로 디자인도 대담하고 과감하며 추상적이고 현대적입니다. 한두 개 더 선을 그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절제가 돋보이네요. 그 덕분에 이 백자는 대단히 현대적인 분위기입니다. 지금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세련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철화(鐵畵)무늬입니다. 철화무늬는 철분이 함유된 철사(鐵砂) 안료로 자기 표면에 갈색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하지요. 철화무늬는 청자, 백자, 분청사기에 골고루 나타납니다. 백자철화끈무늬병에서 본 것처럼 자기의 철화무늬는 시대를 막론하고 간결함과 추상성, 활달함과 대범함, 익살과 해학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요.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철화기법은 숙련된 솜씨로 빠른 시간에 그려야 하는 특성으로 인해 정밀함보다는 대범함이 요구됩니다. 그렇다보니 필선(筆線)의 강약과 운동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 운동감과 대범함이 간략화, 추상화, 그리고 익살과 해학 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5∼16세기에 만들어졌던 분청사기 하면, 흔히 자연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의 미학을 떠올리게 되지요. 그 분청사기 가운데에서도 철화무늬의 자유분방함이 단연 두드러집니다. 쓱쓱 몇 번의 붓질로 풀을 표현한 것, 자신만 한 물고기를 낚아채는 새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한 것, 순진한 눈빛으로 수초(水草·물풀)를 입에 물고 있는 물고기를 표현한 것 등등. 그 자유분방함과 재치 있는 넉살에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풀이나 나무, 새를 표현한 철화도자기를 보면 그 감각의 추상성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살펴본 백자철화끈무늬병은 고도의 추상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감각과 추상적 아름다움은 요즘 현대 작가의 작품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지요. 이뿐이 아닙니다. 너덧 번의 붓질로 쓱쓱 풀을 표현했거나 투둑 몇 차례 필선을 꺾어 매화나무 가지를 그린 것인데 그것은 금세 한 편의 추상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구름 속을 날아가는 새를 그렸는데 그것이 새인지 구름인지, 그 추상성과 율동감으로 마치 보는 이가 허공을 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철화무늬의 또 다른 매력은 도자기 표면의 공간 구성입니다. 철화무늬를 보면 도자기 표면의 상부나 하부 등 한쪽에 치우치게 배치해 나머지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다른 기법의 도자기 무늬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철화무늬 도자기만의 독특한 특징이에요.

17세기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호림박물관 소장)는 국화 네 송이를 엮어 윗부분에 배치하고 아래쪽은 여백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조선백자의 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18세기 전반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국보 107호·이화여대박물관 소장)는 철화무늬가 연출하는 공간 구성이 지극히 매력적입니다. 이 백자는 주둥이 바로 아래에서 몸체 상반부까지만 포도 무늬를 그려 넣고 그 아래는 완전히 비워 놓아 여백을 시원하게 살렸습니다.

철화무늬에서 익살과 해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백자항아리에 그려 넣은 호랑이 무늬가 대표적이지요. 호랑이의 표정을 볼까요. 커다랗게 뜬 두 눈은 무섭기는커녕 친숙하고 편안할 따름입니다. 철화무늬가 아니면 발견하기 어려운 익살과 해학이에요.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의미의 끈 무늬, 자신만 한 물고기를 낚아채는 새 무늬,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빠진 물고기 무늬 모두 익살이고 해학이 아닐 수 없지요.

옛 사람이 우리에게 전해준 철화무늬 도자기는 이런 것입니다. 재치와 자유분방함, 해학과 익살, 낭만과 여유, 그러면서 세련된 디자인까지. 생활용품이지만 현대 미술품 못지않은 고도의 미감과 예술성이 살아 숨쉰다고 볼 수 있어요. 도자기에서 만나는 철화무늬는 이렇게 매력적입니다. 그 매력과 특징은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히 ‘한국적 미감’이라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백자철화#문화재#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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