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같은 내부… 막힌 비상구… 건물은 21세기, 방재는 20세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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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터미널 화재 이후]
터미널-쇼핑몰 등 대형복합건물 본보 취재진이 직접 살펴보니

콘크리트 건물에 파이프가 통과하면서 생기는 틈을 그대로 두면 화재 발생시 연기가 빠져나가며 불이 커질 수 있다. 파이프로 층간 연결(위쪽)이나 측면 연결(아래쪽)을 한 경우 검은 파이어스톱으로 막은 사례. 모던실리콘 제공
콘크리트 건물에 파이프가 통과하면서 생기는 틈을 그대로 두면 화재 발생시 연기가 빠져나가며 불이 커질 수 있다. 파이프로 층간 연결(위쪽)이나 측면 연결(아래쪽)을 한 경우 검은 파이어스톱으로 막은 사례. 모던실리콘 제공
27일 서울 강남구 아셈타워(41층).

기자는 아셈타워에 화재가 났다고 가정하고 3층 에스컬레이터 옆 복도에서 비상 탈출을 시도해 봤다. 3층 콘퍼런스룸 옆 복도에서 불이 켜진 비상구 등 아래의 문을 열었지만 황당하게도 계단은 없었다. 정면과 왼쪽은 벽으로 막혔고, 오른쪽에는 청소도구함만 있었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꼼짝없이 갇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아셈타워 3, 4층에만 이처럼 ‘막힌 비상구’가 층별로 3곳씩 6곳이나 있었다.

아셈타워 4층 무역아카데미 앞에서는 대피 안내 표지로 보이는 초록색 화살표를 따라갔지만 무역아카데미 IT센터 강의실로 들어가는 문만 나올 뿐이었다. 비상시에 오히려 실내로 안내받은 셈이다. 소방 관계자는 “아셈타워 지하는 출구로 통하는 경로들이 얽혀 복잡하고 방향을 분간하기도 어려워 화재가 발생하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26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고양종합터미널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희생자들은 순식간에 퍼진 연기에 질식됐다. 생존자들은 “검은 연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를 가려 출구를 찾기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전문가들은 고양터미널과 같은 대형 복합건축물은 영화관과 대형마트, 쇼핑몰, 터미널, 지하철 역사 등이 한데 모여 있다 보니 통로가 복잡해 화재 발생 시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들이 대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본보 취재진이 27일 대형 복합건축물과 다중 이용시설의 대피경로 등을 살펴본 결과 대낮이고 실내가 밝았는데도 탈출로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에 위치한 복합쇼핑몰 디큐브시티는 내부가 곡선형 미로처럼 생겨 이용객들의 대피 동선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초행길이던 기자가 지하 2층과 지하 1층 구조를 층별 안내도를 보지 않고 파악하는 데 15분이 넘게 걸렸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IFC몰도 복잡했다. 27일 오후 IFC몰을 방문한 이시연 씨(34)는 “세 바퀴를 돌았는데 제자리일 정도로 내부가 너무 넓어 늘 위치가 헷갈린다. 불이 나면 어느 방향으로 탈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근영 강남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쇼핑몰은 매출 증대를 위해 고객이 모든 쇼핑 공간을 볼 수 있도록 에스컬레이터와 통로 등 동선을 길게 만들지만 빠른 대피에는 방해가 된다”며 “설계 단계에서부터 매출과 안전을 모두 고려하게 하는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건물이 늘고 있지만 방재시설과 기준은 여전히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건축물은 21세기인데 방재시설은 20세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영업장의 넓이에 따라 피난통로 수를 정하고 있지만 외국의 경우 사용 면적, 수용 인원, 보행 거리의 적정성, 스프링클러 설치 등 피난 관련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피난통로의 수와 배치를 정하고 있다.

복잡한 건물 내 각 공간들 사이의 조그만 틈새를 막는 규정을 마련해 유독가스가 퍼질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고양종합터미널 화재에서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8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유독가스에 의한 질식이었다. 불길과 유독가스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등을 통해 전용통로처럼 뻗어나갔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의 좁은 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존자 문용찬 씨(33)는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면서 연기가 새어들어 왔다”고 증언했다.

최규출 동원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미국처럼 모든 건물에 ‘파이어스톱(fire-stop)’을 쓰도록 의무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물 틈새에 끼워 넣거나 표면에 발라 화재 발생 시 불길과 연기가 퍼져나가는 걸 막는 물질들을 통틀어 일컫는 ‘파이어스톱’은 최근 안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국내 대형 건물이나 공장 등에서도 확산되는 추세다.

화재 발생을 알리는 데 통상 사용되는 비상벨은 큰 소리가 지속돼 화재 시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판단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진국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음성으로 안내하는 경우가 많다.

:: 파이어스톱 (Fire-Stop) ::

연기를 막고 불길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건물 내부의 빈 공간이나 틈새를 밀봉하는 화재 차단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형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고 불에 타지 않는 실리콘 혼합물질을 사용한다.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고양터미널 화재#대형복합건물#파이어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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