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속에서 123… 돌잔치땐 ABC… “엄마, 난 아기라고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행복 충전 코리아]<1>아이와 젊은이가 행복한 나라
아기에게 ‘아기의 권리’를

임신 8개월째인 권모 씨(31)는 지난해 말부터 고교 1학년용 수학 문제집을 사서 하루에 한 장씩 풀고 있다. 일명 ‘수학 태교’다. 권 씨는 “언젠가 TV에서 아들을 과학고에 보낸 엄마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태교를 어떻게 했냐는 말에 ‘수학의 정석’을 풀었다고 하더라”며 “그걸 보면서 나도 임신하면 꼭 수학 태교를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수학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갑갑해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권 씨는 그럴 때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기분을 달래고, 도저히 안 풀리는 고난도 문제는 그냥 넘긴다. 그는 “이렇게 수학 태교라도 해놓으면 나중에 아이가 수학을 못하더라도 엄마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 것 같다”고 말했다.

○ 배 속에서부터 교육열에 시달리는 아기들

대한민국에서 아이 교육은 유아기도, 학령기도 아닌 ‘태아’ 시절부터 시작된다. 많은 임신부들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태아를 학습 태교의 장으로 몰아넣으며 교육열을 올린다.

지인들 사이에서 ‘태교의 고수’로 불렸던 김모 씨(35)는 4년 전 첫아이를 가졌던 임신부 시절에 총 10가지가 넘는 태교를 했다. 스도쿠, 수학 문제 풀이, 산수와 연관된 게임을 하는 다양한 수학 태교는 기본이었다. 김 씨는 매일 손으로 한자를 쓰면서 외우는 ‘한자 태교’와 영어 알파벳이 적힌 낱말카드를 태아에게 읽어주는 ‘영어 태교’도 했다.

김 씨는 “어떤 외국인이 쓴 책을 봤는데 임신 때 알파벳과 숫자가 적힌 카드를 만들어 태아에게 읽어줬더니 출생 6개월 때부터 알파벳을 알아봤다더라”며 “태아의 뇌가 발달하는 시기에 태교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확신 때문에 이러한 태교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신부들 사이에서는 태교를 위한 공부 모임도 유행이다. 이모 씨(32)도 1년 전 첫아이를 가졌을 때 매주 2번씩 임신부 7명과 모여서 1시간 반씩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 동화책과 회화 교재를 사서 함께 영어로 대화하고 단어를 암기하는 모임이었다.

이 씨는 “임신 때부터 태아에게 영어를 들려주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영어에 친숙해지지 않을까 싶었다”며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 영유아 시절부터 교육 프로그램


아기들은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면 본격적으로 학습의 세계로 들어선다. 시중에는 0∼2세 아이들의 지능을 키워준다는 각종 교재와 DVD, 교구들이 무수히 출시돼 있다.

2세 딸을 키우는 임모 씨(39)도 아이가 돌이 갓 지났을 때 100만 원대의 영아용 교재를 구입했다. 알록달록한 퍼즐을 맞추는 교구와 함께 그림책 교재가 있는 제품이다. 그는 “교재를 이용해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의 어휘력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쌍둥이 아들딸(3)을 둔 김모 씨(42)도 1년 전 160만 원을 들여서 영아용 교재를 샀다. 별도로 방문교사를 고용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교재로 수업을 해주도록 했다.

김 씨는 “이 교재를 쓰면 아이들의 공간지각능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더라”며 “기대한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제일 비싼 좋은 교재를 사줬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든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임신 때부터 각종 업체로부터 영유아기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일종의 세뇌를 당한다. 임신 7개월째인 김모 씨(35)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임신부들을 위한 산모교실에 가서 강의를 듣는데, 가보면 매번 육아 관련 업체들이 와서 홍보를 한다”며 “영유아 때부터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하니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아기에겐 아기일 수 있는 권리를

전문가들은 부모들 사이에서 떠도는 태교와 교육에 관한 속설 중 상당수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김문영 제일병원 주산기과 교수는 “수학 태교가 아이의 두뇌 발달에 효과적이라거나, 영어 태교가 아이가 영어를 친숙하게 느끼게 한다는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태아에게 효과가 있다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태교는 오감 중 ‘청각’뿐이다. 실제로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선 배 속에 있을 때 소리 자극을 받은 쥐가 뇌세포가 더 잘 발달돼 있고, 미로를 더 잘 통과하며 좋은 지적 능력을 보인 것이 관찰됐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리는 80∼100dB(데시벨)의 저음이다. 태아는 사람의 목소리, 음악 소리뿐 아니라 엄마의 심장 소리와 장이 움직이는 소리, 양수 흐르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들으면서 뇌를 발달시킨다.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 자체는 청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좋을 수 있지만 외국어를 들려준다고 외국어에 친숙해지진 않는다.

김 교수는 “태교의 근본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기를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며 “임신부가 영어나 수학 공부를 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운 감정이 든다면 괜찮지만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태아에게도 결국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0∼2세의 아기에게 과도한 학습을 시키는 것도 피하라고 지적한다. 김효원 서울아산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4개월까지는 엄마와 일대일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학습을 시키기보다는 얼굴을 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공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아기에는 놀이를 통해 인지능력이 발달하므로 함께 놀아주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인형놀이를 할 때 같이 놀아주고,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손가락을 폈네요”라는 식으로 그게 무슨 행동인지를 말로 설명해 주는 게 좋다.

과도한 교육열은 폐해가 많다. 김효원 교수는 “유아 때부터 영어유치원을 다니며 과도한 영어 학습을 강요받은 아이는 영어를 싫어하게 되거나 대소변을 지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행복 충전 코리아#태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