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너덜너덜한 손주 운동화가 눈에 밟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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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전남 여수시의 한 면사무소에 “한 노인이 A가게에서 결식아동에게 방학 동안 급식 대신 주는 장당 3000원짜리 식품권을 현금으로 바꿔 갔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면사무소 측은 이 사실을 확인했지만 가게 주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교환업소만을 바꾼 뒤 사건을 마무리했다. 정부는 결식아동 식품권을 현금 술 등으로 바꿀 경우 해당 금액만큼 환수하는 등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결식아동 식품권 30여 장을 현금으로 바꾼 이는 박미자(가명·72) 할머니였다. 4년 전 아들이 지병으로 숨졌고 며느리까지 가출해 손자(13·중3)를 홀로 키우는 그가 식품권을 현금으로 바꾼 건 손자의 ‘낡은 운동화’ 때문이었다. 손자의 너덜너덜해진 운동화를 보고 가슴이 아팠지만 돈이 없었다. 결국 A가게에서 식품권을 현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사정해 새 운동화를 샀다. 박 할머니는 “낙도에서 부모 없이 자라는 손자가 불쌍했다. 손자가 다음 달 도시의 한 대학에 무료연수를 가게 돼 새 신발을 사주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박 할머니가 사는 곳은 주민이 460여 명에 불과한 섬. 이곳에서 올 겨울방학 급식 지원을 받는 결식아동은 초등생 2명, 중학생 2명. 섬에는 버스도 없어 박 할머니는 40분이나 걸어가 가게에서 손자의 식품권을 바꿨다.

또 다른 결식아동인 초등생 형제는 식품권 한두 장을 들고 가게까지 걸어와 과자·음료수 등으로 바꿔 가고 있다. 정부는 식품권으로 과일 채소 햄 등 영양가 있는 식품으로 교환하도록 권장하지만 일부 외진 지역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런 열악한 여건이 식품권을 현금으로 바꾸도록 부채질한 셈이다.

올 8월 전국 결식우려 아동 41만2459명 중 부식배달·식품권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아동은 7만8917명(19%). 자치단체별로 결식아동 끼니당 급식비는 서울 강남구가 5500원인 반면 전북은 3000원에 불과할 정도로 천차만별이다.

전남 신안군은 사람이 사는 섬이 73개로 가장 많다. 우편배달원과 자원봉사자가 1∼2주일에 한 번씩 육지 등에서 계란·과일 등을 대신 구입해 섬에 사는 결식아동들에게 무료로 배달해 주고 있다. 박 할머니가 사는 섬 결식아동 4명에게도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복지전문가는 “아무리 생활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식품권을 현금으로 교환하는 것은 원칙에 위배된다. 낙도 결식아동을 위한 급식대안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수=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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