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영향력 상위 350명중 86명, 연구비 한푼도 못받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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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분야 연구능력 첫 분석]<下>연구능력-연구비 비교해보니

정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많이 받는 학자는 그만큼 실력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해당 분야의 연구 성과가 많거나 가시적인 결과를 낸다는 평가가 나오니 지원을 많이 받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실상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연구비와 연구능력이 일치하지 않았다. 연구능력은 뛰어나지만 정부의 연구비를 전혀 받지 못하는 학자가 적지 않았다. 신진 학자가 연구비를 지원받는 과정에서 불리한 점도 나타났다. 한국연구재단이 파악한 정부의 연구비 배분 내용을 동아일보가 한국연구재단 그리고 소셜미디어 분석업체인 ㈜트리움과 공동으로 분석한 결과다.

○ 연구능력과 연구비 순위가 맞지 않아

정부의 연구비가 연구를 잘하는 학자에게 흘러가는지 알아보려고 분석팀은 최근 10년의 자료를 수집했다.

연구능력은 2004∼2013년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된 논문 및 참고문헌 데이터를 통해 개별 학자의 논문이 학계에서 직간접적으로 얼마나 인용됐는지(보나시치 영향력지수)로 확인했다. 또 2003∼2012년에 연구재단의 연구사업통합관리시스템(E-RND)에 오른 연구비 총액을 집계했다. 두뇌한국(BK)21, 인문한국(HK), 중점연구소지원사업 같은 정부의 주요 학문지원 사업을 모두 포함해서다.

분석한 결과 7개 학문 분야(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정치외교학 교육학 한국어·문학 역사학)에서 논문 영향력이 가장 높은 350명 가운데 86명(24.5%)이 연구비를 전혀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분야별로 보면 경제학에서 연구비 지원액수가 0원인 학자가 1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행정학 14명 △정치외교학, 교육학 각 12명 △한국어·문학, 역사학 각 11명 △사회학 7명이 뛰어난 연구능력에도 불구하고 연구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 제도 미비로 연구비 격차 생겨

분석팀은 연구능력과 연구비를 비교하면서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간극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내 연구지원 제도가 선진국에 비해 미비하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다.

예를 들어 연구비가 압도적으로 많은 학자는 BK21 같은 대형 사업단의 책임자를 맡아 연구비를 대표로 받은 경우라고 추정했다. 연구비 기준으로 행정학 1위인 최영출 충북대 교수(중점연구소지원 사업 등 연구과제 23건 수행), 교육학 1위인 곽금주 서울대 교수(중점연구소지원사업 등 연구과제 26건 수행)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연구능력과 연구비의 격차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컸다. 이유를 알기 위해 연구능력이 뛰어나지만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한 학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했다.

중견 학자 사이에서는 △정부가 원하는 주제에 맞추고 싶지 않아서 △연구비 신청서와 보고서 작업을 하느라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아예 연구비를 신청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많이 나왔다. 행정학에서 연구능력은 1위, 연구비는 30위인 박천호 명지대 교수는 “정부 용역이나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사업을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그에 맞는 내용을 써줘야 하고 논문이 아닌 용역보고서로 끝나기 쉽다”고 설명했다.

젊은 학자나 지방 소규모 사립대 교수들은 현재의 제도에 불신을 드러냈다. 40대 초반인 서울 소재 대학의 A 교수는 “소장파 학자가 개척하는 연구 아이템은 연구비 선정에서 탈락하기 십상이다. 심사를 하는 학자나 관료가 꺼린다”고 전했다. 충청권 대학의 B 교수는 “대학의 파워가 연구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내 연구 실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학교에서 사업단을 꾸리면 전국 단위 심사에서는 늘 탈락하더라”고 전했다.

○ 연구능력에 맞춰 지원할 필요

연구비 지원기준이 객관적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지원 대상 선정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연구능력이 뛰어난 신진 학자를 제대로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커졌다.

연구재단은 이번 분석을 통해 연구능력과 연구비의 불일치 현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만큼 앞으로는 연구능력을 연구비 배분의 근거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예를 들어 미국처럼 전체 사업비의 일정 비율을 연구사업관리전문가(PM)가 톱다운 방식으로 나눠주도록 재량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연구책임자가 신진 소장 학자를 찾아내서 격려하고 지원하는 여건을 만들자는 취지다.

연구재단 관계자는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연구책임자의 재량권이 위축되는 바람에 잠재력이 있는 학자에게 연구비를 나눠주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연구를 잘하는 신진 학자가 이번 분석에서 드러난 만큼 이들에게 연구비를 주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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