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현충일]열여덟 작은오빠를 찾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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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형님 빽으로 편한곳 갈순 없습니다” 최전방 자원한 꽃다운 고3
■ 수필가 신도자씨 현충일 기고

60여 년 전 철없던 시절 덤덤하게 떠나보낸 오빠(고 신덕균 이병)는 이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오빠의 유해는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수필가 신도자 씨가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봉안관에서 참배를 하며 오빠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60여 년 전 철없던 시절 덤덤하게 떠나보낸 오빠(고 신덕균 이병)는 이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오빠의 유해는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수필가 신도자 씨가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봉안관에서 참배를 하며 오빠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지만 이를 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군에 가지 않기 위해 돈과 ‘빽’은 물론이고 원정 출산에 심지어 수술까지 받는 사람도 많죠. 동아일보는 6일 현충일을 맞아 전쟁으로 작은오빠(고 신덕균 이병)를 떠나보낸 수필가 신도자 씨의 기고를 게재합니다. 신 씨는 60여 년간 전사한 오빠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

온천지에 녹음이 우거져 가고 있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나는 더욱더 신록처럼 간절한 오빠 생각에 가슴이 저려 온다. 작은오빠가 떠난 지 벌써 63년, 반세기가 더 넘어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향한다.

오빠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현충탑 ‘위패 봉안관’으로 들어섰다. 엄숙하면서도 섬뜩함을 느끼게 해 주는 내부는 9만여 전사자 이름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제21판 4호 078번, 작은오빠, ‘신덕균’의 이름이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그 수많은 전사자 이름 가운데 오빠 이름 석 자는 마치 조그마한 점 하나와도 같다. 나는 오빠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커다란 덩어리가 가슴속에 내려앉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눈물이 온몸으로 번져 왔다.

6·25전쟁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아직도 산야에 남겨진 호국용사들의 유해가 13만여 구에 달한다고 한다. 미수습 전사자의 9만여 위패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위패 봉안관에, 4만 명의 위패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입대 전인 1950년 성남고 3학년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했던 고 신덕균 이병. 신도자 씨 제공
입대 전인 1950년 성남고 3학년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 주자로 활동했던 고 신덕균 이병. 신도자 씨 제공
1950년 고교 3학년이던 작은오빠는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군에 자원입대해 최전선으로 지원했다. 그 얼마 전까지 아버지는 육군 참모총장이었으며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전북 편성관구 사령관으로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당당히 일선으로 보내셨다. 평생을 원리 원칙과 청렴결백을 생활신조로 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살아가시던 그대로였다.

경기 가평지구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오빠는 전사했고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으로 병을 얻으셨고 집안 분위기는 늘 침울하기만 했다. 우리 남매들은 오빠를 잃은 기막힌 현실이 꿈이기를 바라면서 오랫동안 슬픔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은 고위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와 그 당시 포병사령관이던 큰오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서 작은오빠가 전사했다는 데 대해 몹시 애석해 했다.

1998년 고위 공직자 자녀들에 대한 병역기피 문제가 제기됐었다. 그때 신문 사회면 6월 25일자에 작은오빠 기사가 실린 일이 있다. 작은오빠가 부모님께 쓴 편지가 공개된 것이다. 기사는 이렇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고 신덕균 씨의 편지, 그는 6·25 발발 당시 전북 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52년 국방부 장관이 된 신태영 씨 아들이다. 고 3때 전쟁이 터지자 육군에 자원입대한 그는 최일선 전투부대를 지원했다. 신 씨는 1950년 10월 13일에 어머니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포병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교장님이 “네가 원하면 형님(신응균 당시 포병사령관) 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하더군요. 제가 거기에 찬성해야 옳았겠어요? 부친이나 형님 ‘빽’으로 편하고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 갔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최전방을 지원한 이상 살아서 돌아가리라 믿지 않고 바라지도 않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작은오빠가 일선으로 떠나던 날 새벽에 잠시 집에 들렀었다. 어머니가 급히 차려 주신 밥상을 받고 군화를 신은 채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달게 아침을 먹던 오빠, 그 늠름하고 믿음직스럽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지(死地)로 보내면서 애써 눈물을 삼키셨다. 너무도 철이 없던 나는 그저 덤덤하게 오빠를 떠나보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좀더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을 것을.

유해라도 빨리 찾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찾았다. 몇 해 전 경기 성남시 분당 수도육군병원에서 유전자 감식을 위한 채혈을 한 일이 있는데 그동안 유전자 감식 방법이 많이 발전되어 타액으로 검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구강세포 채취를 받으면서 이제라도 오빠가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느다란 희망을 품어 본다.

자랑스러운 오빠는 내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것이다. 덕균 오빠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오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나는 아직 오빠를 보낼 수 없다. 다시 유월이 왔다.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오빠가 너무나도 그립다.

[채널A 영상]“7303명의 외로운 유해, 그 가족을 찾습니다”
#현충일#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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