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그 많던 어린이대공원 놀이기구 어디로 갔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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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을 지켜온 88열차 궤도가 3월에 철거되는 모습(위).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9종은 198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아래 왼쪽). 하지만 노후화하면서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지난해 6월 마지막으로 고별 운행을 했다(아래 오른쪽). 이후 모두 철거된 뒤 고철로 팔려 포스코의 용광로로
들어가 사라졌다. 어린이대공원 제공
30년간 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을 지켜온 88열차 궤도가 3월에 철거되는 모습(위).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9종은 198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아래 왼쪽). 하지만 노후화하면서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지난해 6월 마지막으로 고별 운행을 했다(아래 오른쪽). 이후 모두 철거된 뒤 고철로 팔려 포스코의 용광로로 들어가 사라졌다. 어린이대공원 제공
그곳은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정문에 들어서서도 1km는 더 가야 했다. 하지만 정문을 지날 때부터 마음이 부풀 대로 부푼 아이들은 숨이 차는 것도 잊은 채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쇳덩이가 음속을 돌파하는 듯한 굉음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꺄악∼” 하는 비명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놀이동산’이란 팻말이 나타나고 그 너머 2만5701m²(약 7770평) 땅엔 당시로선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고개를 위로 젖히면 88열차를 실은 길이 587m 궤도가 공중에서 굽이쳤다. 24인승 88열차는 최고 시속 80km를 자랑하며 아이들 비명을 동력삼아 하루 130회 곡예를 펼쳤다. 1973년 설치된 청룡열차를 대신해 1984년에 둥지를 튼 ‘최신식 놀이기구’ 88열차는 15명씩 한 열을 만들어 줄을 서고도 줄이 놀이동산 바깥까지 이어질 정도로 인기였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83년 설치된 바이킹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다. 사람들은 서울 시내 놀이동산 중 최초로 설치된 40인승 바이킹에 오르려고 2시간을 기다렸다. 놀이동산에서 30년째 근무한 홍현순 어린이대공원아이랜드 본부장은 “초기 4, 5년간은 바이킹을 처음 타 본 사람들이 구토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했다.

같은 시기 설치된 대관람차는 밤이면 아이들보다 연인이 많았다. 1980년대 연인들은 대관람차가 운행하는 6분 동안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키스를 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려왔다. 이 놀이기구들은 놀이동산을 위탁 운영했던 동마기업이 1983∼1995년 들여온 놀이기구 9종 중의 대표주자들이었다.

○ 잘근잘근 분해된 88열차 궤도

16일 오후 기자가 찾은 놀이동산에는 놀이기구 9종이 한 대도 없었다. 소형 놀이기구 몇몇 만이 놀이동산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 놀이기구가 있던 자리에는 잡초가 자라 황량함을 더했다.

3월 28일 놀이동산엔 대형 크레인 두 대와 포클레인 한 대 등 철거 장비가 들어왔다. 산소절단기 불꽃이 튀더니 88열차 궤도가 1, 2m 간격으로 ‘잘근잘근’ 잘렸다. 30년을 지켜온 궤도가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바이킹 배는 땅으로 엎어졌고 역시 1, 2m 간격으로 절단됐다. 대관람차와 파도그네도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잘게 잘렸다.

놀이기구 안전진단 업무를 맡고 있는 한국안전학회와 한국종합유원시설협회는 2011년 11월 회의를 열어 놀이기구 9종에 대해 시한부 생명을 선고했다. 노후화가 심해 2012년 6월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통보였다. 박상규 어린이대공원 원장은 “추억이 담긴 만큼 최대한 고쳐 쓰려고도 해봤지만 어떠한 보수도 무의미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라고 했다.

지난해 7월 1일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놀이동산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놀이기구의 추억을 남기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먼저 논의된 건 놀이기구 매각. 놀이기구 무역상을 자처한 ‘업자’들이 찾아와 “놀이기구를 팔아넘기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놀이기구를 동남아시아로 수출하면 10억∼20억 원은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철거한 놀이기구를 처분할 권한을 주면 2억∼3억 원을 대공원 측에 지급하겠다는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 업자도 있었다. 변호사에게 자문해 얻은 결과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안전진단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놀이기구가 재사용돼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판매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불량 놀이기구’를 파는 건 도덕적으로도 맞지 않다는 얘기였다.

폐기물을 소재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정크 아트 전문가에게 소재로 제공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놀이기구가 예술작품으로 되살아나면 추억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규모가 큰 놀이기구를 해체하면 상징성이 훼손돼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적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놀이기구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 용광로로 들어간 추억

어린이대공원은 대형 철강업체에 납품한 실적이 있는 철거·고철처리 업체를 선정했다. 철거 업무 위탁계약서에 ‘1, 2m 크기로 절단해 절대 재사용할 수 없게 한다. 고철을 철강업체로 가져갈 때 어린이대공원 측 관계자가 동행해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는다’는 등의 내용까지 세세히 적었다.

18일 동안 철거 작업을 마친 뒤 잘게 잘린 9종의 놀이기구는 차례차례 25t 트럭에 실려 포스코 광양제철소로 떠났다. 30년 치 추억은 269t의 고철로 변했고 kg당 390원, 약 1억500만 원으로 바뀌어 추억을 품고 용광로로 들어갔다.

30년 전의 페인트 색이 여전히 남은 ‘고철’ 놀이기구가 떠나던 날 홍 본부장은 “후련하면서도 씁쓸했다”고 말했다.

“늘 불안했어요. 저 오래된 기구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고요. 그 애물단지들이 잘려서 사라지는데 오랜 친구를 화장장으로 보내는 것처럼 먹먹하더라고요.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30년을 일한 한 세대가 퇴역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철거된 놀이기구를 대체할 ‘최신식 놀이기구’ 9종은 내년 4월에 놀이동산에 들어온다. 멀리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지에서 제작되는 놀이기구가 차례차례 들어올 예정이다. 1세대 놀이기구는 퇴역했지만 이제 2세대 놀이기구가 새로운 추억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광진구#어린이대공원#놀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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