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생떼쓰니 통하더라”…기업 울리는 블랙컨슈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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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새 206차례 2억 뜯어낸 대위 출신 50대 구속



“내가 육군 대령 북파공작원 출신이라고! 말 안 들으면 너희 집 주소 알아내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겠어!”

지난해 여러 차례 수리 받은 고물 스마트폰을 들고 와 행패를 부리는 그의 기세에 휴대전화 매장 직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새 제품 가격으로 환불을 요구하는 그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쇠귀에 경 읽기’여서다. “너희들 옷을 벗겨버리겠다”며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며 협박하는 그의 발길을 돌리게 하려면 손에 돈을 쥐여주는 방법뿐이었다.

○ 손쉬운 돈벌이 ‘블랙컨슈머’

1980년대 말 육군 대위로 전역한 이모 씨(56)는 그렇게 돈을 벌었다. 전역 뒤 의류 관련 잡지를 만드는 일에도 뛰어들고, 옷 장사도 해봤지만 실패가 이어진 뒤였다. 2010년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의 길을 택했다. 자본이나 전문기술 없이 생떼와 협박, 그리고 ‘큰 목소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가족과 친구 이름을 빌려 스마트폰 22대를 개통했다. 이어 해지와 개통을 반복하면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통신사 콜센터 직원과는 밤낮으로 통화했다.

이 씨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휴대전화 대리점을 찾아 “고객 응대가 왜 이 모양이냐”며 행패를 부렸다. 통신사 여성상담원들에게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부어버리겠다”고 협박해 직원이나 회사 측으로부터 돈을 뜯어냈다. 고객과의 다툼이 외부로 알려져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칠까봐 경찰에 신고도 못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쉽게 돈을 손에 쥐자 범행이 계속됐다. 이 씨는 “고장 났다”며 냉장고 수리 서비스 직원을 불렀다. 냉장고 전원을 일부러 끄고 음식을 상하게 한 뒤 “온도가 높아 값비싼 ‘백두산 상황버섯’도 다 못쓰게 됐다. 언론사에 제보하겠다”고 주장했다. 트집을 잡으며 제보 전화를 걸겠다는 말에 회사는 이 씨에게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무마했다.

그는 또 보증기간이 지나거나 여러 차례 수리를 받아 더이상 무상수리를 받을 수 없는 휴대전화를 들고 제조사 서비스센터를 찾아 행패를 부리며 환불을 요구하는 등 2010년부터 최근까지 206차례에 걸쳐 공갈과 협박으로 2억4000만 원가량을 뜯어내다 7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속됐다.

○ ‘영웅’ 되는 악성 블랙컨슈머도

이 씨 같은 블랙컨슈머가 기업에 기생하며 돈을 빨아먹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부는 교묘하게 ‘반기업’ 정서까지 이용한다.

2010년 5월 이모 씨(30)는 자신의 집에서 휴대전화가 충전 중에 폭발했다며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이어 “글을 올리자 대기업 제조사가 소시민인 나를 협박하는 한편 돈으로 회유했다”고 주장했다.

이 제조업체는 “기계 결함이 아닐 수 있다”고 했지만 일부 온라인 매체 등이 이 씨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면서 논란이 커졌다. 당시 일부 노동단체는 제조사 사옥 앞에서 1인 시위까지 벌인 그를 ‘대기업 횡포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치켜세웠다. 그는 ‘환불남’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유명인이 됐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는 달랐다. 이 씨가 스스로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가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지난해 4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올해 출소했다. 이 씨는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지금은 반성하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이 입은 피해는 아무도 배상하지 않았다. 해당 기업 관계자들은 지금도 “하도 억지에 끌려 다닌 일이라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젓는다.

○ ‘소액매수’는 이제 그만

악성 루머로 협박하는 이들은 기업이 당장의 이미지 훼손을 감수하면서 법적 대응에 나서기보다는 소액만 주고 무마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노린다. 특히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가 주를 이루는 분야에서 나쁜 이미지는 매출 감소로 직결돼 더욱 민감하다. 블랙컨슈머가 활개 칠 만한 조건이다.

실제로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제품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협박하며 돈을 내놓으라는 일이 다반사지만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 아닐 때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도 “먹다 남은 과일을 들고 와 당도가 낮다고 억지를 부리고 새것으로 교환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난동이라도 부리면 이미지만 나빠져 이를 들어준 적도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는 블랙컨슈머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만큼 이들의 행동을 분석해 맞춤형 대응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소비자 역시 과도한 권리 주장이 모욕죄나 업무방해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헌·서동일 기자 hparks@donga.com
#블랙컨슈머#소액매수#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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