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제자의 미소가 추억으로 차곡차곡… 행복을 담는 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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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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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법/ ‘사진찍는 섬마을 선생님’ 이병호 교사

이병호 교사를 만난 건 지난달 31일 오전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였다. 연평초중고등학교 전체가 수학여행을 갔다가 연평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포즈가 영 어색했지만, 이따금 짓는 미소는 참 따뜻했다. 인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병호 교사를 만난 건 지난달 31일 오전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였다. 연평초중고등학교 전체가 수학여행을 갔다가 연평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포즈가 영 어색했지만, 이따금 짓는 미소는 참 따뜻했다. 인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제 사진요? 아마 없을 텐데…. 아, 반 애들이랑 찍은 사진이 하나 있을 거예요. 혹시 그거라도 괜찮나요?” 늘 카메라를 곁에 두는 그다. 그런데 정작 본인 사진은 없어 작년 졸업앨범에 들어간 단체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남들 찍어주느라 정작 본인이 모델로 설 기회는 없었다는 설명.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원래 그렇단다.》
물론 변명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어색해한다. 이에 대해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어릴 적 카메라와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란 궁색한 이유를 내놓았다. 시골에서 살 땐 카메라 구경도 하지 못했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도시로 ‘유학’을 나왔지만 혼자 몸이라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었다고.

그러다 언젠가 자기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씁쓸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더란다. 그런 허전함을 제자들은 갖지 않길 바랐다. 지금은 연평도에서 일하는 이병호 교사(49)가 ‘앨범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된 이유다.

○ 밤새 만든 첫 앨범


그는 원래 사진에(물론 찍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다. 지구과학교육을 전공해 천체사진도 많이 찍어봤다. 그래도 개인용 카메라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 사듯 뚝딱 사버릴 물건은 아니었다. 첫딸(20)이 만 네 살이 되고, 둘째 딸(17)이 돌이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먹었다. 비싸더라도 있을 건 있어야겠다 싶었다.

교사로 임용된 지 10년 만인 1996년, 첫 카메라를 장만했다. ‘니코’에서 나온 자동카메라였다. 어린 딸들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담으려 신나게 셔터를 눌러댔다. 학교에서도 과학답사 때마다 요긴하게 썼다.

학생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인천여자고등학교에 있던 2001년부터였다. 수학여행이나 답사 때 밝게 웃는 아이들을 무심코 카메라에 담은 게 시작이었다. 당시는 ‘미놀타’에서 만든 필름카메라를 썼다. 학교로 돌아온 뒤 사진들을 모두 현상했다. 40명 정도 되는 학생들에게 본인들 모습이 나온 사진을 1장씩 나눠줬다.

그런데 책상에 쌓인 필름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나중에 친구들 사진도 함께 보고 싶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사진을 아이들 숫자에 맞춰 40장씩 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교무실에 있던 스캐너가 눈에 띄었다.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 파일로 만들면 아이들이 몇 명이건, 사진이 몇 장이건 모두 나눠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웹사이트에서 ‘플립 앨범’이란 프로그램의 공개버전도 찾아냈다. 사진파일을 모아 편집하고, 음악도 넣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우선 한 해 동안 찍은 사진들을 모조리 스캐너로 읽어야 했다. 편집도 시간이 걸렸지만, 자꾸 욕심이 생겼다.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보려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봤다. 12월 초에 시작한 작업은 꼬박 한 달이 지나서야 끝났다. 방학때에도 학교에 나가야 했고, 여러 번 밤을 새워야 했다. 그렇게 만든 첫 디지털 앨범을 40여 개의 CD에 옮겼다. 지금이야 금방이지만 10년 전엔 ‘CD 굽기’도 시간과의 싸움인, 만만찮은 일이었다.

이듬해 2월 그는 학생들에게 CD를 하나씩 나눠줬다. 겉에는 ‘2001년도 2학년 7반 기념앨범-출연자 ○○○’이라고 썼다. 자신이 선물을 주며 뭐라고 말했는지, 아이들이 어떤 말로 화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뿌듯했는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걔들이 벌써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있죠. 그런데 아직도 앨범 얘기를 한답니다. 허허허.”

○ 사진과 앨범의 진화



두 번째 해엔 아예 디지털카메라를 장만했다. 니콘에서 만든 ‘똑딱이’였는데, 그에겐 금방 보물 1호가 됐다. 우선 일일이 스캔을 할 필요가 없으니 작업이 반으로 줄었다. 필름이 모자라 안타까워하는 일도 없어졌다. 아이들 중 누가 눈을 감진 않았는지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한편으론 사진을 맘껏 찍는 바람에 편집과 정리 일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정리해두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사진마다 색상이나 해상도 따위를 조절하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배경음악으로 재즈나 클래식 중 적당한 곡을 고르느라 머리를 싸맸다. 나중엔 아예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곡을 적어내라고 한 다음 그걸 배경으로 깔아줬다.

기왕지사 선물을 하기로 한 거, 좀 더 ‘예쁘게’ 만들어줘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인터넷에서 사진 강좌나 포토샵 강좌를 수시로 찾아봤고, 사진 찍는 기술에 관한 책도 닥치는 대로 봤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지금은 유명작가의 사진집을 보면서 훌륭한 사진의 구도와 느낌을 공부하고 있다. 장비에도 점점 돈이 많이 들어간다. ‘캐논 350D’ 이후부터는 꽤 고가의 카메라로 무장하고 아이들의 미소를 담았다.

“처음에 찍었던 사진을 다시 보면 너무 아쉬워요. 지금만큼만 실력이 됐으면 애들한테 좀 더 좋은 사진을 선물했을 텐데….”

언제인가부터는 사진 앨범 편집이 끝난 후 과학실에서 작은 상영회를 연다. 아이들은 1년간 친구들과 나눴던 추억에, 그리고 그 추억을 고스란히 기록해 준 선생님의 따스함에 감동한다.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게 큰 보람이다.

이 교사로부터 사진앨범을 선물 받은 이는 그동안 줄잡아 500명. 대부분 그가 담임을 맡았거나 과학 동아리 활동을 한 아이들이고, 동료 교사 중 일부도 행운을 누렸다. 인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김예슬 씨(26)는 2003년 이 교사가 담임을 맡았던 인천여고 2학년 8반 학생이었다. 졸업하기 직전 선물 받은 앨범을 지금도 보물 상자 속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단다. 그는 10년 가까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늘 사진 선물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가 무척 진지했다.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았던 1년 위 선배, 제 동기, 1년 아래 후배들 중 교사가 10명이나 나왔거든요. 이게 선생님 영향이 아니고 뭐겠어요?”

○ 연평도 선생님

이 교사는 지난해 초 연평초중고등학교에 중학교 담당으로 부임했다. 지난해 3학년 담임을 맡아 졸업생 6명에게 역시 사진앨범을 선물했다. 올해는 연평도에 나는 야생화를 자주 찾으러 다닌다. 앨범에 예쁜 꽃 사진을 넣어주면, 학생들이 고향을 보다 아름답게 기억하지 않을까란 기대에서다. 마침 의기투합한 동료도 있다. 지난해 함께 부임한 정문원 교사(49)다. 알고 보니 정 교사는 그와 동갑내기에다 대학동기이기도 했다. 사진을 취미로 삼고 싶다는 친구에게 카메라 작동법이나 사진 찍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이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계속 사진앨범을 만들 거란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도 계속해줄 생각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운 일들이 참 많아. 힘들다고 생각될 때 이 앨범을 한번 꺼내보렴. 나이를 먹으면 어릴 적 기억만 떠올려도 힘이 날 수가 있거든.”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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