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일제징용 소녀들의 넋,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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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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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공장 끌려갔다가 지진으로 6명 참변 당해
日시민들 성금모아 추모비… 11월 터 이전 참관단 모집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도토쿠 공장에 있는 도난카이 대지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희생
자 추모비. 당시 이 공장에서 근무한 무라마쓰 씨(오른쪽)가 대지진으로 희생된 조선인 소녀들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도토쿠 공장에 있는 도난카이 대지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희생 자 추모비. 당시 이 공장에서 근무한 무라마쓰 씨(오른쪽)가 대지진으로 희생된 조선인 소녀들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1944년 5월경 광주 전남과 대전 충남에서 소녀 300명이 일제 군수업체인 미쓰비시 중공업 일본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노역에 시달리던 소녀들 중 일부는 1944년 12월 7일 오후 1시경 일본 아이치 현을 강타한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에 희생된다. 항공기 제작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조선 소녀 6명과 일본인 51명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숨진 조선 소녀들은 모두 광주 전남 출신이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패전 이후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일본인의 추모비를 건립하면서 조선인 희생 사건은 은폐하려 했다. 희생자 명부에서도 소녀들의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켰다.

1986년경 다카하시 마코도(高橋信·고교 역사교사) 씨, 고이데 유타카(小出裕) 씨 등은 미쓰비시 중공업이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실규명과 억울하게 숨진 소녀들을 위해 기록을 수집했다. 광주 전남지역을 방문해 유족들을 만났다.

마코도 씨 등은 1988년 12월경 억울한 소녀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나고야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참사가 일어난 지 44년 뒤 공장 터에 숨진 소녀들 이름을 하나하나 새긴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한 것이다. 이들은 성금을 모아 추모비 건립식에 참여한 유족들에게 항공료와 숙박비를 지원했다.

추모비 건립은 한일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운동에 나서는 첫 계기가 됐다. 마코도 씨 등과 유족들은 1999년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양심적 변호사 45명은 변호인단을 꾸려 소송을 대리했으나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마코도 씨 등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지원회)’를 결성해 현재까지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이 추모비는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시민사회단체 연대를 이끌어냈다.

이 추모비는 올 11월 4일 자리를 옮긴다. 추모비 터는 일본 한 기업 소유다. 해당 기업은 ‘지원회’ 취지에 공감해 추모비를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최근 경영난으로 공장 터를 팔게 돼 추모비를 옮겨야 할 처지가 됐다. 이전 장소를 물색하던 ‘지원회’는 공장 터에서 50m정도 떨어진 병원 주차장 정원에 추모비를 이전키로 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이 추모비가 일제의 강제연행과 인권유린을 알리고 과거를 넘어 미래를 밝히는 인권과 평화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모임은 28일까지 추모비 이전식에 참여할 방문단을 모집한다. 소요비용은 참가자 자부담이다. 이국언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재일동포나 일본 시민단체, 종교시설에서 세운 일제 강제연행 희생자 추모비가 있지만 희생자 이름 하나 하나를 새겨 기록한 것은 거의 없다”며 “이 추모비는 암울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상징으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주전남#추모비#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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