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구급차 잡았더니… 대신 온 운전자도 비틀비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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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느슨한 단속 악용… 사설구조단 음주사고 잇따라

지난달 8일 오전 2시 50분경 경남 사천시내에서 설모 씨가 면허정지 수준인 혈중알코올농도 0.056% 상태로 구급차를 몰다 마주오던 오토바이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신문배달을 하던 오토바이 운전자 강모 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남 사천경찰서 제공
지난달 8일 오전 2시 50분경 경남 사천시내에서 설모 씨가 면허정지 수준인 혈중알코올농도 0.056% 상태로 구급차를 몰다 마주오던 오토바이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신문배달을 하던 오토바이 운전자 강모 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남 사천경찰서 제공
19일 0시 45분경 서울 금천구 가산동 서부간선도로 진입부로 한 구급차가 사이렌 등을 켜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구급차는 간선도로 진입부에서 경찰이 벌이고 있는 음주단속으로 정지해 있던 차량 행렬을 보고는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 구급차가 차로를 바꿔 경찰을 지나치려고 하자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세웠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자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구급차 운전사 박모 씨(46)의 혈중알코올 농도는 0.115%로 면허취소 수준이었다. 119구급대가 아닌 사설 응급구조단(129) 소속인 이 차량은 시신과 상주를 실고 충북 청주의 한 장례식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황당한 상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박 씨는 혀가 꼬인 목소리로 회사 동료가 운전하는 다른 응급차를 불렀다. 시신과 상주를 목적지까지 대신 옮겨달라는 부탁이었다. 10분 만에 달려온 동료 양모 씨(26) 얼굴 역시 벌게져 있었다. 경찰은 차에서 내렸다가 뒤늦게 음주단속 현장인 걸 알고 급히 시동을 거는 양 씨에게 음주측정기를 들이댔다. 혈중알코올 농도 0.068%. 면허정지 수준이었다. 상주는 “차에 타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지만 구급차는 원래 그러려니 했는데 운전자가 만취상태였다니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이 이렇게 위험할지 몰랐다”고 했다. 금천경찰서는 20일 두 구급차 운전사를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일부 몰지각한 사설 응급구조단 소속 운전사가 이처럼 시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경찰이 사이렌을 울리며 이동하는 구급차는 응급상황인 것으로 판단하고 거의 단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버젓이 술을 마신 뒤 운전대를 잡는 것이다.

지난달 8일 경남 사천시에서는 사설 구급차 운전사 설모 씨(21)가 음주운전(혈중알코올 농도 0.056%)을 하다 오토바이 신문배달원 강모 씨(31)를 치어 숨지게 했다. 설 씨는 경찰조사에서 “24시간 비상대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올림픽 경기 중계를 시청하다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이날 설 씨는 구급차를 개인용도로 이용하다 사고를 냈다.

전문가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응급이송은 소방서에 소속된 119구급대와 사설 응급구조단으로 나뉘어 한다. 전문 구조교육과 지속적인 내부 점검을 받는 구급대원만이 운전하는 119 구급차와 달리 사설 응급차는 1종 운전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다. 미국은 사설 구급차라도 운전을 하려면 응급구조사 등 전문자격을 갖춰야 한다. 일본 역시 환자 이송을 위해선 응급 기초 교육을 받은 ‘승무원 적임증’이 있어야 한다. 이 적임증은 소방총감이 발급한다. 경찰 관계자는 “음주나 신호위반 단속을 나가 보면 사설 응급차 운전사들은 환자 이송을 이유로 교통질서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전했다.

사설 응급구조단 관계자들은 “사설 응급과 관련해 처우가 열악하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반박한다. 응급의료수가가 턱없이 낮아 사설업체들이 갈수록 영세해지면서 응급이송의 질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1995년 책정된 이송요금도 아직까지 그대로다. 사설 응급구조단의 한 관계자는 “대우가 나빠 응급차를 운전하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 제대로 관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응급환자 이송이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응급환자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현재 사설 구급차는 응급 환자는 물론이고 알코올의존증 환자나 정신질환자, 시신까지 이송하고 있다. 규정상 응급 환자 이송 이외엔 사이렌을 켤 수 없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암암리에 환자가 아닌 일반인을 이송하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 구급차를 불신해 길 터주기에 동참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환자 세 명 중 두 명은 응급 처치할 수 있는 시간 내에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구급차라도 응급 환자가 있는 경우에만 응급차량으로 인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차량으로 취급한다. 환자가 없는데 사이렌을 울리며 무단 추월을 하거나 사고를 일으키면 도로교통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유순규 을지대 응급구조학과 교수는 “응급의료 지식이 없고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 구급차를 몰면서 사고가 잇따르는 것”이라며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사설 응급구조단의 자격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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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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