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덕에 내 삶이 달라졌어요… 외교부-무협 공모전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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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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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꿈꾸는 고교생 정채진 양… 더 커진 시장, 더 가까워진 꿈 ‘선인장 연구원’

《정채진 양(17·마산제일여고 2년)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선인장의 꽃’에 비유했다. 가시가 있다고 멀리하면 영원히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일부 논란이 되는 조항이 있다고 무작정 배척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특히 꽃 색깔이 다양한 접목 선인장은 한국 무역과 비슷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눈부신 성과를 냈고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다. 정 양은 외교통상부와 한국무역협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나의 생활과 FTA’ 에세이 공모전에 이런 내용의 글을 기고해 대상을 받았다. 30일 열린 시상식에서 정 양과 함께 금상 2명, 은상 4명, 동상 6명, 장려상 6명 등 모두 19명이 상을 받았다. 정 양과 전호진 씨(54·은상)의 사례를 재구성해 소개한다.》
‘꼴깍.’ 긴장한 탓인지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등에서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FTA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관한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FTA는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요?” 예상했던 질문이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던 중 선인장을 떠올렸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이 외동딸에게 선물로 건넨 선인장. 줄기에 다양한 색의 꽃을 접목했지만 찌그러진 원통 모양의 못 생긴 선인장이었다. 실망하는 표정을 읽은 부모님은 “당장은 예쁜 꽃보다 호감이 안 갈지 몰라도 잘 키우면 꽃도 피운단다”라고 일러 주셨다.

선인장의 가시를 한참 들여다보자 어느덧 외로운 사막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는 선인장이 나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선인장은 나의 친구가 됐고, 누군가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자신 있게 ‘선인장 연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접목 선인장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은 FTA였다. 2011년 한-유럽연합(EU) FTA가 발효한 이후 한국 접목 선인장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70%에서 80%로 뛰어오른 것이다.

아차차, 발표 중이었지! 정신을 가다듬고 선인장 사례를 바탕으로 FTA 발표를 마쳤다. “물론 독소조항에 관한 우려나 각종 실패 사례도 참고해야 합니다. 가시가 있는 선인장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문제죠.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꽃을 피우는 선인장처럼 FTA도 머지않아 국가 경제에 꽃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수출 늘면서 전 직장 복직 전호진 씨

3년만에 재취업 성공… 가장의 눈물이여, 안녕

7일 경남 남해군 원예예술촌으로 여행을 떠난 전호진 씨 가족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전호진 씨 제공
7일 경남 남해군 원예예술촌으로 여행을 떠난 전호진 씨 가족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전호진 씨 제공
내 삶이 바닥을 친 것은 2년 전. 몇 달만 있으면 실직한 지 만 3년을 채우게 되는 때였다. 삼겹살 한 근 때문에 아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험생이 고기 좀 먹자는데, 그거 하나 못 해 주나?”

나도 안다. 고교 2학년 남자 아이는 눈을 뜨고 있는 내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들이 왜 비싼 등심이나 갈비가 아니라 기껏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했는지를. 아들 앞에서 알량한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다. 다만 내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동안에도 불평불만이라고는 한마디도 않던 아내가 아들에게 호통을 칠 줄은 몰랐다. “네가 초등학생이야. 왜 이렇게 반찬타령이야.”

뒤통수를 세게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남편, 못난 아버지…. 나 자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전 직장에서 “잠깐 얘기할 수 있느냐”고 연락이 온 것이다. 예감이 좋았지만 면접에서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자 이게 꿈인가 싶었다.

“저야 좋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실은 FTA 때문에 그래요.”

TV나 신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단어가 내 인생에 그렇게 불쑥 들어왔다. 인사부장은 “우리나라가 연달아 맺은 FTA 덕에 회사의 수출 물꼬가 트였다”며 “수출물량을 관리할 경력직 사원을 모집하는데 이왕이면 회사 일을 아는 분을 모시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뒤 2년. 아들은 대학에 진학했고 아내는 이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시 떳떳한 가장이 됐다. FTA가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또 우리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FTA를 ‘파더스 티어, 아듀!(Father's Tear, Adieu!·아버지의 눈물이여, 안녕)라고 부른다.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FTA#외교부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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