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수업듣는 학생은 한 두명 뿐…’非입시과목 교사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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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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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외국어·한문 등 비입시교과, 수시확대로 주요 대학 입시 반영 미비
담당교사들 수업 줄어 보직 바꾸기도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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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수업을 열심히 할수록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서울 강남의 한 고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L 교사는 3월 3학년 첫 일본어 수업에 들어가 “1년 동안 수업할 범위를 5월까지 모두 마칠 테니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5월 중간고사가 끝나면 그 다음부턴 자습시간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 하지만 수업을 듣는 학생은 40여 명 중 3명 남짓이었다. 2학년 수업도 상황은 마찬가지. ‘집중이수제’로 주 5일간 매일 수업이 진행되지만 수업을 듣는 학생은 한두 명이다.

“수업 시작 전에 10분 정도 유머나 시사이슈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업을 시작하면 하나둘씩 자거나 다른 과목 공부를 합니다. ‘20분만 수업하고 자율학습을 할 테니 집중하자’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수업을 빡빡하게 하거나 과제를 많이 내주면 반발합니다. 수업을 열심히 할수록 학생들이 싫어하는데 교사로서 무슨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L 교사는 결국 20년 넘게 수업한 일본어 전공을 최근 포기했다. 현재는 하루에 1∼2시간만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학교 공문을 처리하거나 학교 행사를 준비한다. 8월까지 연수를 받아 2학기부터는 진로진학상담교사를 맡을 예정. L 교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전교 1등도 외면하는 제2외국어·한문 수업

최근 대입 수시모집이 확대되고 집중이수제가 시행되면서 제2외국어, 한문 등 비입시과목 수업의 파행이 심화됐다. 과거에도 비입시과목 교사들이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일은 있었지만 최근엔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제2외국어, 한문과목을 신입생 선발 평가요소로 반영하는 대학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2, 3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대나 서울교대 등에 진학하고자 하는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은 제2외국어와 한문 수업을 들었다. 이들 대학이 이들 과목의 내신 및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을 입시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서울대가 수시모집으로 모집정원의 약 80%를 선발하는 등 수시모집이 대폭 확대되면서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수시모집을 준비하는 학생은 학교 내신 성적과 비교과 활동을 관리하며 수능 최저학력기준 과목인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과목만 공부하면 되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나 한문 내신 성적은 시험 직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해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거의 없다.

적잖은 주요 대학들의 경우 수능에서 탐구과목 중 한 과목의 성적을 제2외국어나 한문 성적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수시모집 확대로 영향력이 줄었다. 수시모집에서 중요한 논술고사와 구술면접에 대비하려면 기초가 되는 탐구과목 공부가 필수이기 때문. 특히 일반고 학생들은 외국어고 학생들과 경쟁이 어려워 제2외국어 공부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울 강남의 고교에 다니는 최상위권 성적의 고3 H 군(18)은 “서울대 수시 일반전형을 준비하기 때문에 제2외국어나 한문 공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학교 중국어 수업은 반 45명 중 한 명만 수업을 들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의 한 고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S 교사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한문교육과를 지원해도 한문 내신 성적을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면서 “‘거부권’을 가르치면 ‘거북이권’으로 이해할 정도의 학생도 있지만 대학을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 집중이수제로 고1, 2수업까지 파행… 국·영·수

수업만 늘어

바뀐 교육과정은 비입시과목의 수업파행을 구조적으로 더욱 심화시켰다. 현재 고3이 적용받는 ‘7차 교육과정’에서는 기술·가정은 6단위를, 외국어군에서는 영어를 제외한 1과목 이상을, 교양과목은 2과목 이상을 이수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고1, 2가 적용받는 ‘2009개정 교육과정’은 제2외국어, 한문, 기술·가정, 교양 과목 등을 ‘생활교양과목’으로 통합해 3년간 약 3과목(16단위)만 이수하면 된다. 교육과정을 개정하며 학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체 수업시간은 줄이고, 모든 교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꿔 학교의 교과편성 자율권을 높인 것. 하지만 대부분의 고교는 자율권이 주어지자 비입시과목 수업을 줄이고 국어·영어·수학 수업을 늘렸다.

서울 강남의 한 일반고 S 교사는 “비입시과목 수업 비율을 유지하려 해도 학부모들이 국·영·수 수업을 늘리라고 요구한다”면서 “일반고보다 자율권이 더 많은 자율형사립고는 기술·가정 과목 등은 아예 개설조차 안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집중이수제’의 시행은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상대적으로 대입의 영향을 적게 받는 고1, 2의 비입시과목 수업까지 영향을 받았다. 집중이수제가 시행되면서 많은 고교에서 한 학기에 몰아서 비입시과목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대입에 영향이 없는 ‘교양’ 수업을 매일 들으면 부담만 될 뿐 동기부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경기 지역의 고2 박모 군은 “수능, 내신, 비교과, 논술까지 모두 챙겨야 대학에 갈 수 있어서 ‘죽음의 사각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입시 부담이 많다”면서 “당장 마음이 급한데 비입시과목까지 공부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 전공 포기하거나 학교 떠나는 교사 늘어… “융합인 재교육 역행”

비입시과목 수업이 파행으로 치닫자 담당 교사들은 등 떠밀리듯 담당 과목을 바꾸거나, 진로진학상담교사로 보직을 바꾸기도 한다. 이마저도 쉽지 않은 50대 중후반 교사들은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서울 지역의 경우 현재까지 ‘2013년 복수전공 자격 신청’을 한 교사의 100%가 국어, 수학 과목(각 15명)을 지원했다.

인천 지역 한 고교의 N 교사는 “최근 정부가 정책적으로 학교에 창의적 융합인재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국·영·수 수업만 늘면서 거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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