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손효주]法틈새 교묘히 악용… 청목회재판도 ‘도가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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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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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주 사회부
손효주 사회부
8월 24일 오후 서울북부지방법원 대법정.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에서 불법 후원금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기소된 국회의원 6명에 대한 결심 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피고인 측은 상식을 깨는 변론으로 일관했다.

변론의 핵심은 이랬다. “현행 정치자금법 제31조 제2항은 ‘누구든지 단체와 관련된 자금으로 기부할 수 없다’고 돼 있어 돈을 기부하는 행위만 금지했을 뿐 돈을 받은 국회의원은 처벌 대상이 안 된다.” 신성한 법정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부정한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조항에는 ‘받는 것도 부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변호인은 비서와 회계책임자들의 진술 등을 통해 해당 국회의원이 자금 수수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법 조항의 작은 허점을 ‘창의’적으로 파고들었다.

법원은 5일 변호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의원들의 ‘성실한 의정활동 수행’을 참작한다며 낮은 형량을 선고했다. 솜방망이 판결의 전형이었다. 이날 선고 공판에서 한나라당 권경석 유정현 조진형 의원과 자유선진당 이명수 의원 등 4명은 선고유예를 선고받았다. 선고유예는 유죄로 분류되지만 형벌로 따지면 무죄나 마찬가지다. 민주당 최규식 의원만 당선무효형(벌금 100만 원 이상)에 해당하는 벌금 500만 원을, 같은 당 강기정 의원은 벌금 90만 원을 선고받았다.

영화 ‘도가니’ 속의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 재판과 청목회 사건 재판은 상식 이하의 변론에 이은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도가니 사건에서도 각종 증거로 성폭력 자체를 부인할 수 없게 된 피고인 측 변호인은 법의 작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인화학교 장애인 학생이 성폭력을 당할 당시 만 13세 미만이 아니었고 최대한 항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항거불능인 상태에서 추행한 사람을 처벌한다는 규정과 미성년자 의제강간(상대방이 동의했어도 13세 미만을 상대로 한 성행위는 처벌)이 적용되는 연령이 13세 미만이라는 규정의 틈을 공략했다. 결국 이 사건 2심 재판부는 주범인 교장 김모 씨(당시 62세)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죄질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이었다.

청목회 재판은 국회의원의 위선과 맞물리면서 도가니 재판에 뒤지지 않는 비난을 몰고 왔다. 국회의원들은 인화학교 사건이 논란이 되자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은 성폭력 특례법의 ‘항거불능’ 조항 적용과 성폭력 범죄에 관대한 양형을 거세게 비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법원은 변명만 하는 것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청목회 사건은 누가 봐도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다. 법원도 우리를 실망시켰다”고 했다. 한 의원은 “청목회 회원들이 국회의원을 찾아와 사정을 호소하고 10만 원을 준 것을 처벌하느냐”고 따졌다. 영화 도가니에서 교장이 “귀여워 몇 번 쓰다듬어줬을 뿐”이라고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발언이었다.

정치인은 유독 자신들의 잘못에 관대해 왔다. 그들은 도가니 판결에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받은 ‘솜방망이 처벌’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가니 사건 속 가해자와 변호인의 모습에서 우리 정치인의 삐뚤어진 형상을 본 것은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 장애아를 성폭행하고도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국민이 준 입법권을 악용해 불법 자금을 받고도 뻔뻔하게 구는 국회의원을 바라보는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특권의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인지…. 선거를 통한 심판의 필요성이 새삼 중요하게 느껴졌다.

손효주 사회부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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