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2차 핵분열’… 계열분리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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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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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 전문성 강화로 글로벌 영토 확장
암 - 문어발 사업으로 中企 영역 침범

1차 계열분리를 한 대기업 집단 중 일부는 업종 전문화와 책임경영 강화를 통해 분리 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룹 위상도 높였다. 신세계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등이 1차 계열분리 후 더욱 성장한 회사로 꼽힌다.

○신세계, 분리 직후보다 356.4% 성장


신세계그룹은 1997년 삼성가에서 분리된 그룹사 중 가장 규모가 작았다. 8개 계열사를 포함한 그룹 전체 매출액은 2조 원(2010년 가치 기준 3조320억 원)에 머물렀다. CJ그룹이 13개 계열사에 총 2조366억 원, 한솔그룹이 21개 계열사에 총 2조59억 원이었다. 하지만 2010년 말 신세계그룹의 매출액은 13조8370억 원으로 뛰었다. 그룹 매출 254조 원인 삼성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CJ그룹(10조9840억 원), 한솔그룹(5조8405억 원)보다 많다.

현대중공업은 현대 일가 가운데 가장 비약적 성장을 한 회사로 꼽힌다. 2002년 계열 분리 후 그룹 매출액은 10조2365억 원(2010년 가치 기준 13조925억 원)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매출액은 49조7690억 원으로 280.1% 증가했다. 그룹 대표인 현대중공업은 세계 조선업계 부동의 1위다.

현대자동차 역시 2000년 계열 분리 당시 삼성 현대그룹 LG SK에 이어 5위였던 위상을 2010년 말 2위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뤘다. 해외시장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글로벌 톱4’를 노리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지난해 총매출액은 분리할 때보다 160% 늘어난 129조6430억 원에 달했다.

○ ‘문어발식 확장’으로 구태 답습


하지만 각 그룹은 비슷비슷한 계열사를 마구 만들어 선대의 ‘문어발식 확장’ 전략을 답습하는 구태도 보여줬다. 정보기술(IT) 서비스, 레저·호텔, 건설, 물류, 외식업, 광고가 대표적인 중복 계열사였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1차 계열분리 때 쪼개진 23개 그룹 중 절반이 넘는 14개 그룹이 IT서비스 회사를 계열사로 뒀다. 13개 그룹이 레저·호텔 계열사가 있었고 12개 그룹이 건설, 10개 그룹이 물류, 7개 그룹이 외식업 계열사를 갖고 있었다.

IT서비스의 경우 소규모 자본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있고 그룹 계열사의 보안시스템 등 물량을 몰아줘 손쉽게 매출을 늘릴 수 있다. 비슷비슷한 계열사 양산은 내수시장에서 과당경쟁을 부추기고 해외시장에서 허약 체질이 되게 하는 폐단을 초래했다. IT서비스 국내 1, 2위인 삼성SDS와 LGCNS가 지난해 거둔 매출 가운데 해외 비중은 각각 19%, 7.9%에 불과하다.

IBM, 엑센추어, BT(브리티시텔레콤), 후지쓰 등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IT서비스 회사의 해외 비중은 70% 이상이다. 한 외국계 IT서비스업체 관계자는 “그룹 울타리 안에서 사업을 하다 보니 치열한 경쟁 환경에 놓이는 일이 드물다”며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내수 서비스 사업 중기 영역 침해


최근 유통업계 및 소상공인들의 눈길은 삼성·롯데·신세계 등 재벌가 딸들이 벌이는 ‘베이커리형 카페 전쟁’에 쏠리고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베이커리형 커피 전문점 ‘아티제’를,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은 미국의 프라미엄 식품점 ‘딘앤델루카’를 시작했다. 삼성에서 갈라져 나온 두 집안 딸들이 식품사업에서 맞붙은 셈이다.

여기에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외손녀 장선윤 블리스 대표도 가세했다. 장 대표는 프랑스 베이커리 전문 브랜드 ‘포숑’의 사업권을 따내고 본격 영업에 들어갔다.

중소상인으로 구성된 창업계는 이들의 행보로 인해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강병오 FC창업코리아 대표는 “대기업이 외국 브랜드를 갖고 들어와 손쉽게 창업을 한다”며 “이는 중소상인도 죽이고 창업 아이템의 글로벌화도 막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광고업계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광고 계열사들은 모기업의 지원 아래 성장세를 높여가는 한편 중소기업의 영역으로도 사세 확대를 꾀한다. 한 중소형 독립 광고대행사 대표는 “최근 대기업 계열사가 대학광고, 정부기관의 저가 단발성 프로젝트에도 뛰어들면서 중소형 광고사는 설 자리가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해외선 가족형 기업 분화 찾기 힘들어


해외에서는 한국 같은 ‘자녀를 위한 기업 쪼개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 우물 파기’로 업종 전문화에 집중했기 때문에 나눠 가질 계열사도 없는 데다 자녀에게 회사를 대물림 해주기보다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창업 일가는 이사회 참여를 통해 후선에서 지원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업체인 BMW는 전체 주식의 46%가량을 퀀트가(家)가 보유하고 있다. 퀀트가는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소유만 한다. 일본의 도요타 역시 창업주와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이끌어 가면서 다른 업종으로 외도하지 않은 자동차 제조 전문회사다.

연혁이 150년 넘는 미국 코닝은 유리에 집중해 성과를 거뒀다. 한눈팔지 않고 연구개발에 매진한 결과 스마트폰에 쓰이는 신제품을 내놓아 성공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너의 자녀라는 이유로 아들은 A회사를, 딸은 B회사를 나눠가지는 식의 계열 분리는 한국 경제의 전근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분리된 기업들도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보다는 전문화, 특화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다시 부는 ‘계열사 분리’ 바람 ▼

1990년대 이후 국내 대기업의 역사는 계열분리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창업 1세대에서 2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활발한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93년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씨의 한솔그룹을 시작으로 CJ와 신세계가 차례로 삼성에서 떨어져 나왔다. 1998년부터 시작된 현대그룹의 계열분리는 2000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가의 적통을 두고 싸운 ‘왕자의 난’을 거쳐 2003년 일단락됐다. 2002∼2003년에는 대표적인 계열분리 모범 사례로 꼽히는 LG와 GS, LS의 계열분리가 있었다.

2005년 한진그룹에서 한진중공업과 메리츠화재가 분리된 이후 비교적 잠잠하던 대기업의 계열분리는 이제 제2기를 맞고 있다. 1993∼2005년 일어났던 계열분리가 1차 분리였다면 최근 일어나거나 일어날 조짐이 보이는 계열분리는 2차 핵분열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이다. 삼성그룹은 3세대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에버랜드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이 경영 전반에 나서며 셋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성 측은 “이재용 사장을 중심으로 그룹을 운영한다는 방침 외에는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당장 분리하기에는 지분 구조도 복잡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이 분리 절차에 들어갔다고 본다. 이들의 사장·부사장 승진과 이부진 사장의 신라호텔 등기이사 선임이 신호탄이라는 해석이다. 또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내려오는 ‘분가(分家)’ 원칙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경영권을 승계한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분가 방식으로 분리가 됐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올 초 최신원 SKC 회장이 “뿌리 찾기와 책임경영 강화를 위해 SK그룹도 이제는 사촌 간 계열분리를 할 시기가 됐다”고 언급하면서 계열분리 이슈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SK그룹의 계열분리설은 1998년 최종현 명예회장 사망 이후부터 잊을 만하면 불거졌던 이슈로 재계는 SK그룹이 계열분리 된다면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의 두 아들인 최신원 최창원 형제가 SKC, SK케미칼 등 화학산업을, 고 최종현 명예회장의 두 아들 최태원 최재원 형제가 에너지와 통신을 맡는 구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수년 전까지 ‘형제 경영’을 표방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9년 기업회생절차(워크아웃)가 시작된 이후 박삼구 그룹 회장과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계열분리가 진행 중이다.

롯데그룹은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 회장이 아직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지만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이 2월 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계열분리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신세계는 이달 1일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를 분리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승계를 위한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용진 부회장이 이마트를 경영하고 동생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백화점과 조선호텔 경영권을 갖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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