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 상처’ 서해5도의 설]백령도 출신 박승헌 기자 ‘착잡했던 귀향’ 6박7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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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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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라, 내가 뭍으로 가마” 피란같은 역귀성 행렬… 섬은 설을 잊었다.

얼어붙은 바다위엔 먹구름만 지난달 28일 백령도 북쪽 해안 고공포구에는 며칠째 이어진 한파에 유빙들이 북에서 밀려와 바다를 가득 메웠다. 얼어붙은 바다만큼이나 냉각됐던 남북관계 속에서 몸살을 앓았던 서해5도는 황량한 바다처럼 썰렁한 설을 맞았다. 멀리 북한 황해도 지역이 희미하게 보인다. 백령도=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얼어붙은 바다위엔 먹구름만 지난달 28일 백령도 북쪽 해안 고공포구에는 며칠째 이어진 한파에 유빙들이 북에서 밀려와 바다를 가득 메웠다. 얼어붙은 바다만큼이나 냉각됐던 남북관계 속에서 몸살을 앓았던 서해5도는 황량한 바다처럼 썰렁한 설을 맞았다. 멀리 북한 황해도 지역이 희미하게 보인다. 백령도=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 며칠째 이어진 한파에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와 연평도, 소연평도 등 서해5도의 북쪽 해안과 포구는 북에서 밀려온 유빙(遊氷)이 가득했다. 꽁꽁 언 바다만큼 분위기도 차가웠다. 설 연휴 기간 찾은 서해5도는 지난해 백령도 서남해역에서 터진 천안함 폭침사건과 이어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의 여파로 아직도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명절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서해5도 땅을 밟기 위해 달린 거리는 뱃길로 700km. 배 안에서 보낸 시간은 15시간 정도였지만 인천에서 출항해 하루에 딱 한 번 오가는 ‘인천∼소연평도∼연평도’ 노선과 하루 2회 왕복하는 ‘인천∼소청도∼대청도∼백령도’ 뱃길을 이용해 5개 섬을 모두 돌아보는 데에는 6박 7일이나 걸렸다. 기자의 고향인 백령도에서는 풍랑주의보로, 연평도에서는 짙은 해무로 여객선 출항이 통제돼 각각 하루 동안 발이 묶이기도 했다. 북녘과 마주한 최전방 우리 땅에 가는 길은 어지간한 해외여행보다 멀고 험했다. 》
○ 텅 빈 연평도의 설

설 당일인 3일 연평도. 부서지고 그을린 가옥과 포탄에 맞아 찌그러진 자동차들은 석 달 전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깨진 횟집 수조에는 말라 죽은 우럭과 광어 등이 얼어붙어 있었다. 역귀성을 택한 주민들은 섬을 떠났고 거리엔 주인 없는 개들만 돌아다녔다.

이날 연평도에 남은 주민은 130여 명. 지난해 10월 주민등록상 인구가 1756명, 실거주자도 약 13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연평면사무소 관계자는 “포격 뒤 주민 대부분이 섬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 지난달에는 300명 정도가 섬에 머물렀지만 이들도 설을 지내러 대부분 뭍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포격에 집을 잃은 주민들을 위해 연평초등학교 옆 마을 테니스장에 마련된 39동(棟)의 임시 가옥에도 한 가구만이 남아 설을 맞을 뿐 텅 빈 모습이었다. 임시 가옥에서 만난 조순애 씨(47·여)는 포격 다음 날 섬을 떠나 인천 찜질방과 경기 김포의 아파트를 전전하다 왔다고 했다. 그는 “직장 때문에 섬을 떠나지 못한 남편과 함께 설을 보내기 위해 연평도로 돌아왔다”며 “임시 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명절을 맞아 육지로 나가거나 친척집 등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 백령도… 같은 풍경 달라진 분위기

지워지지 않은 상흔 포격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평도에는 130여 명의 주민만이 섬에서 설을 맞았다. 설 하루 전인 2일 주민들이 떠난 섬에는 관광객 몇몇이 포격 현장을 찾았고(왼쪽), 부서진 가옥을 대신해 마련된 39동의 임시가옥에는 한 가족만이 남아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연평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워지지 않은 상흔 포격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평도에는 130여 명의 주민만이 섬에서 설을 맞았다. 설 하루 전인 2일 주민들이 떠난 섬에는 관광객 몇몇이 포격 현장을 찾았고(왼쪽), 부서진 가옥을 대신해 마련된 39동의 임시가옥에는 한 가족만이 남아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연평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천안함 폭침사건 취재를 마치고 섬을 떠난 지 9개월 만인 지난달 28일. 다시 찾은 고향 백령도는 겉보기에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천안함 사건 당시 출입이 통제됐던 사곶 해수욕장은 이제 문을 열었지만 무장한 해병대원들이 조를 이뤄 경계근무를 펴고 있었다. 천안함 실종자 수색과 선체 인양작업을 돕던 어선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장촌 포구에 들어서자 경계근무 중인 한 해병대원은 “무슨 일이냐”며 “훈련이 있으니 어서 나가달라”고 재촉했다.

백령도 곳곳에 있는 66개의 방공호도 기자가 어릴 적 기억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그때 백령도 방공호는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방치되거나 아이들의 담력시험 놀이터로 이용됐다. 이렇다 할 놀이시설이 없는 백령도 아이들은 2∼2.5m 높이의 방공호 출입구에서 뛰어내리거나, “안에 고양이 시체가 있다. 귀신이 나온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눈 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뿐인 방공호 안에 혼자 들어갔다 나오는 놀이를 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찾은 방공호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주민들이 사용하던 스티로폼과 양초가 널려 있었다. 지난해 방공호는 생존을 건 ‘진짜 담력시험장’으로 변했다.

백령도 주민 박길녀 씨(65·여)는 “연평도 포격 당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집 옆에 있는 방공호 안에서 촛불을 켜고 불안에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이곳에서 태어나 살면서 이렇게 섬 분위기가 얼어붙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 애써 태연한 척… 대청도, 소청도, 소연평도

상처를 입기는 대청도와 소청도, 소연평도도 마찬가지였다. 천안함 인양작업 당시 대청도는 기상이 악화될 때마다 작업에 투입됐던 크레인과 바지선들의 피항지로 이용되며 사건 현장을 지척에서 지켜봤다. 그 이후 관광객은 발길을 끊었다. 이곳 주민들은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육지에도 생활 기반이 있는 주민들은 섬을 떠나려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명절 분위기도 나지 않았다. 주민들은 육지에서 설을 지내기 위해 섬을 떠났다. 실제로 지난달 31일 대청도에 입항하는 여객선에서 내린 인원은 20여 명에 그쳤다. 소청도를 찾은 사람은 10명이 채 안 됐다. 설을 하루 앞둔 2일 인천에서 소연평도를 찾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청도 나루터에서 여객선 표를 파는 박양규 씨(63)는 “여전히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곳으로 자식들을 오게 하는 대신 부모들이 육지로 향해 동네가 텅 비었다”고 말했다.

○ 그래도 삶의 터전을 버릴 순 없다

주민들은 뭍으로, 뭍으로 떠났지만 해병대원들은 설도 잊은 채 꿋꿋이 섬에 남아 우리의 바다를 지켰다.

지난달 29일 찾은 백령도 해병 제6여단의 북쪽 해안 경비초소에는 ‘서해5도 절대사수’라는 붉은색 글씨 표어 아래 해병대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유난히 기승을 부린 한파에 바다는 꽁꽁 얼어붙었고 눈까지 내렸지만 백령도에서 13.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북한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을 바라보는 해병대원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초소 경계에 나선 김동욱 일병(22)은 “분단 이후 긴장의 연속 속에서 살아온 주민들을 생각하면 나태해질 수 없다”며 “우리 몸이 곧 국경이라는 생각으로 철통경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외롭게 서해 최북단을 지키던 서해5도는 이렇듯 깊은 상처의 흔적이 역력했다. 생존기반은 흔들렸고 설에도 고향을 등지고 뭍으로 향할 정도로 섬 곳곳에는 불안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포격 다음 날 섬을 떠나 피란 생활을 하다 2일 고향인 연평도를 찾은 유지선 씨(34·여)는 “정말로 섬을 떠나려고 생각했지만 삶의 터전을 버릴 수는 없다”며 “다시 연평도에 돌아와 예전처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연평도를 끝으로 다시 인천으로 향하는 배 안. 백령도에서 만났던 군 관계자의 마지막 인사가 떠올랐다.

“다음에 올 때는 기자가 아니라 고향을 찾은 평범한 주민으로 오길 바랍니다. 비극적인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로 다시 섬을 찾을 거라면 앞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해5도=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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