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 접고 옥바라지 부모님, 고국의 성원이 날 버티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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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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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서 살인 누명 벗은 한지수 씨 귀국

온두라스에서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2년여 만에 귀국한 한지수 씨(왼쪽)가 6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 한원우 씨의 손을 잡고 있다. 한 씨는 “온두라스 교도소로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 무죄 입증을 위해 노력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온두라스에서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2년여 만에 귀국한 한지수 씨(왼쪽)가 6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 한원우 씨의 손을 잡고 있다. 한 씨는 “온두라스 교도소로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 무죄 입증을 위해 노력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파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마지막으로 눈을 밟아 본 게 언제인지 한참을 떠올려야 했다. 온두라스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석 달간의 옥살이와 1년간의 가택연금을 겪다가 마침내 누명을 벗고 2년여 만인 5일 고국으로 돌아온 한지수 씨(28·여). 한 씨는 6일 아버지 한원우 씨(58)와 함께 경기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 할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저 왔어요, 할아버지….” 한 씨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어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인천 할머니 댁에서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차려 주셨어요. 이틀 동안 준비하셨대요.” 한 씨는 추위로 발그스레해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는 2008년 8월 스킨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두라스 로아탄에 머무르던 중 네덜란드 여성 살인사건에 휘말렸다가 2009년 8월 이집트 공항에서 인터폴에 체포됐다. 온두라스 현지 감옥에 3개월간 수감됐다가 그해 12월 가석방된 뒤 1년간 산페드로술라의 한인교회에서 연금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1월 무죄선고를 받고,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과 함께 머물다 5일 귀국했다. 한 씨는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줘 풀려나는 데 도움이 컸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본보 2009년 10월 2일자 A13면,
[단독]20대 한국여성, 온두라스 감옥에

12월 16일자 A12면,
“고국 성원으로 풀려났어요”


2010년 10월 18일 A2면 참조

“교도소로 면회 온 아빠를 어떤 표정으로 맞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어요. 조그만 창 사이로 환하게 웃는 아빠를 보면서 처음에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힘을 내 저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죠.” 한 씨는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이 없었으면 수감생활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온두라스에서는 한국과 달리 침구류부터 취사도구, 식재료까지 모두 수감자가 준비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부동산 사업을 접고 온두라스로 날아갔다. 3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면회일에 딸을 찾아가 위로했다. 가택연금 때도 부모님과 언니 등이 3개월씩 돌아가며 한 씨와 지냈다.

“웃으면서 면회를 갔지만 딸을 혼자 두고 돌아서서는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당시 심정을 털어놓는 아버지 한 씨의 눈가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맺혔다. 환한 표정이던 한 씨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감옥에 있을 땐 아빠가 면회 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요. 평소에는 쑥스러워서 한 번도 못 했던 말이었죠.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가 매일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어요.”

한 씨는 찾아뵙고 감사드려야 할 분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사연을 접하고 온두라스 교도소로 책과 소포를 보내주며 응원해 주신 분들, 구명카페 회원들, 트위터 방송국을 운영하며 도와준 김태연 목사님, 온두라스 현지의 삼미건설 직원 등 일일이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한 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김형중 박사와 당시 서울 수서경찰서 강력계장 김정석 경감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1년간 연금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지만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한다. 몇 개월 동안은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지 생각하겠단다. 고생한 가족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지금도 아려온다는 한 씨는 아버지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빠, 이제 제가 지켜 드릴게요.”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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