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특별 社說]한국, 갈등과 대립 넘어 共存의 시대 함께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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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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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완화 없이 선진국 진입 못해…헌법 가치 안에서 좌우 공생을

국은 구호물자를 받던 적빈(赤貧)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전환한 세계 유일의 모델이다. 35년에 걸친 식민지배에서 헤어난 뒤 3년 전쟁을 치렀고, 그 폐허 위에서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올해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의장국으로서 세계 주요국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 달러 안팎에서 심화한 분열과 자해(自害)가 선진국으로 가는 진입로에서 장애물이 되고 있다. 각계 지도층도 사회 갈등과 이념 대립을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 발전을 스스로 저해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법률 종교 등 모든 분야에 이념의 너울이 덧씌워져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남북으로 허리가 끊긴 나라가 동서(東西)와 좌우(左右)로 다시 찢겨 신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천안함 관련 서한을 유엔에 보낸 참여연대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섰을 때도 “너희는 누구 편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많았다. 이념에 따른 편 가르기가 횡행하면서 사실을 존중하는 이성과 과학은 설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됐다.

서구처럼 200∼300년 동안 시민사회 성숙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데다 우리 사회의 특수성까지 겹쳐 이념 갈등이 증폭됐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국토분단, 동족상잔의 6·25전쟁, 장기간에 걸친 독재와 민주화운동의 대결 구도, 세계에 유례없는 북한 세습전제체제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서 이념 대립을 격화시켰다. 단기간의 고도성장을 통해 국가가 발전하고 국민이 부유해졌지만 상대적 빈곤의식이 확산됨으로써 갈등의 온상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런 그늘을 걷어내지 않고는 국리민복의 지속적 증진을 꾀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한국사회의 갈등 양상을 진단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심층 시리즈를 연재했다. 보수와 진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 물질주의적 가치관, 인권의식, 집단적 정치의식 표출, 환경 같은 분야에서 견해를 달리한다. 그러나 실증적인 연구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지 않다. 문제는 이를 이용하려는 일부 정치세력과 극단적 이념집단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갈등을 확대하고 악용한다. 이념의 거품을 걷어내고 밝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한다면 보수와 진보는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결의 단초는 나를 포함해 모두가 자신의 인식 틀(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점,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이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수세력은 건국과 경제발전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다. 그렇지만 소외되거나 패배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보수 지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진보세력은 과거 반(反)독재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에 빠져 있다. 진보세력은 권위주의 체제와 전투적으로 싸우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권위주의를 따라 배웠으며 진보 기득권에 집착하는 또 다른 수구(守舊)세력이 됐다.

한국사회에서 좌우가 공존(共存)하려면 대한민국 헌법이 허용하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대전제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친북극좌 세력이 북한 핵실험을 ‘자위권’이라고 주장하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과 우상화, 인권탄압을 옹호하는 것은 진보의 진정한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다. 진보와 반(反)대한민국 친북은 냉정한 구분이 필요하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 대화의 테이블에 함께 앉을 수도 있고 회초리를 들 수도 있다는 점을 좌우 모두 인정해야 공존이 가능하다.

과연 이 나라에 따뜻한 보수, 합리적 진보는 있는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소모적 쟁투의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익과 민생을 놓고서도 이념의 갑옷을 입고 편을 갈라 맹목적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국리민복이 손상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경제적 번영과 국가발전의 요체이자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추세인 자유무역과 노사 상생의 산업평화에 이르기까지 양쪽의 주장이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 한국은 통상국가로 살아야지, 고립돼서는 살 수 없다. 시장을 개방하면 무조건 잘된다는 보수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국가와의 FTA에는 침묵하는 일부 진보세력의 태도는 더욱 이율배반적이다.

3의 길을 내세워 1997년 집권했던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마거릿 대처 보수당 정권의 시장주의 경제정책 기조를 이어받았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는 토니 블레어의 계승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중도에 가까운 ‘개혁 보수’ ‘따뜻한 보수’를 추구해 올 5월 집권에 성공했다. 선진국에서는 이념이 아니라 정책노선과 경제모델이 정권선택의 기준이 되면서 이념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우리 정치권은 갈등을 녹여내는 용광로가 되기는커녕 갈등의 풀무 노릇을 하고 있다. 타협이 안 될 때는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원리이건만 여·야당은 정권을 잡았을 때와 내주었을 때 완전히 태도를 바꿔 물리적 격돌을 멈추지 않는다. 정치권이 지나치게 ‘진영 논리’에 함몰되다 보니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횡행하고 건전한 내부비판도 침묵을 강요당하게 된다.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권력구조도 상생의 정치를 저해한다.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은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절실한 덕목이다. 한나라당 정미경 의원과 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4대강 사업을 놓고 서로 여야의 처지를 바꿔 토론한 ‘역지사지(易地思之) 실험’은 신선했다. 두 의원은 머리와 말이 따로 노는 ‘인지(認知) 부조화’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토론이 끝난 뒤 “상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소통의 공감대가 넓어졌다”고 함께 평가했다. 국회의원이 당론이나 계파의 논리에 얽매이기보다 독립적 입법기관으로 소신껏 의정활동을 해야만 정치의 상생과 공존이 가능해진다.

환위기 이후 사회 안정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한번 근로빈곤층으로 떨어지면 재기하기 어려운 사회구조가 큰 문제다.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자면 ‘위’를 잡아 누를 것이 아니라 ‘아래’를 끌어올려야 한다. 스스로 땀 흘려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창의적 사회복지정책이 바람직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계층이동이 가능하고 활발해야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영국 보수당의 새 복지장관 이언 덩컨스미스는 계층이동의 세 가지 요소로 교육, 직업, 안정된 가정을 꼽고 이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8월 31일자 동아일보에는 “어린 것 셋 두고 어찌 갈꼬”라며 한숨짓는 최성철(가명·75) 할아버지 부부의 사연이 실렸다. 이혼한 아들딸이 맡긴 세 아이를 데리고 충북 청주시 낡은 다세대주택의 반(半)지하방에서 사는 조손(祖孫)가정의 한 달 생활비는 55만 원.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손자가 “국영수 학원에 보내 달라”고 했지만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다. 강석민(가명·33) 씨는 택시 운전사로 하루 열일곱 시간을 일해도 월소득 150만 원에 지출은 190만 원이다. 강 씨처럼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이 348만 명(2009년 기준)에 이른다.

대사회에서 빈곤층이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는 사다리가 바로 교육이다. 우리 사회는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산증인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등과 평준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지만 개천에서 용 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부모가 가난해도 자식들이 가난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면 최 할아버지의 손자가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부유한 가정의 학생에까지 무상급식을 할 것이 아니라 빈곤층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확충해야 옳다.

교육에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고질병은 지나친 이념 집착이다. 교육의 목표는 어떤 이념의 실천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내는 데 있다. 여기에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실증적 데이터와 실용적 자세로 교육문제에 접근한다면 좌우의 이념차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기여입학의 혜택으로 예일대를 졸업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낙오학생 방지법’을 만들어 뒤처진 학생들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개천에서 용이 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학교 간, 교사 간 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 좌우의 이데올로기가 우선일 수는 없다.

등을 합리적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인프라의 구축 없이는 선진복지국가를 이룰 수 없다. 국권 상실의 한일강제병합 100년, 광복 65년, 6·25전쟁 60년을 맞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웅비(雄飛)할 수 있는 절호의 민족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나와 다른 너’ ‘우리와 다른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노력이 절실하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보수가 진보의 정책을 차용하고, 진보는 보수의 가치를 중시하는 통섭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명분론과 흑백논리에 빠져 객관적 진실 추구가 실종된 지적(知的) 풍토에 대한 일대 자성(自省)이 필요하다. 진보든 보수든 집권을 하면 나라를 뒤집는 게 아니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이 변화의 목표라는 점을 서로 인정해야 공존이 가능하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바탕 위에서 공생 공존의 방도를 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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