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좌-우 모두 피해자” 60년만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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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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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군경 ‘피의 보복’ 수십년간 등돌렸던 이웃들
“이제와 좌우가 무슨 소용” 유족회 만들고 합동위령제
내달엔 위령비 제막식 열려

전남 나주시 다도면은 6·25전쟁 당시 좌우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주민 374명(행방불명자 포함)이 희생된 곳이다. 유족들은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 역사의 피해자라며 손을 맞잡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회원들이 23일 주민센터 한쪽에 세워진 위령비를 바라보며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위령비 공식 제막식은 내달 하순에 열린다. 나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남 나주시 다도면은 6·25전쟁 당시 좌우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주민 374명(행방불명자 포함)이 희생된 곳이다. 유족들은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 역사의 피해자라며 손을 맞잡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회원들이 23일 주민센터 한쪽에 세워진 위령비를 바라보며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위령비 공식 제막식은 내달 하순에 열린다. 나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23일 오후 전남 나주시 다도면 주민센터. 널따란 공터 한쪽에 세워진 ‘육이오 동란 다도양민 희생자 위령비’ 앞에 60, 70대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바쁜 농사일을 제쳐두고 나온 이들은 다도양민희생자 유족회원들. “오메 우리 아부지 하고 성님 이름이 여기 있네.” 위령비 뒷면을 살펴보던 박길전 씨(70)가 손가락으로 이름을 가리켰다. 위령비에는 주민들이 6·25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경(軍警)에게 희생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면민 374명의 이름이 깨알처럼 새겨져 있었다. 박 씨는 “다음 달 제막식에 앞서 미리 살펴보러 나왔다”며 “희생자 이름 하나하나를 새겨 넣는 데 꼭 60년이 걸렸다”며 비를 어루만졌다.

○ 이념 대립 속에 희생된 양민들

6·25전쟁은 좌익과 우익이 대결한 이념전쟁이었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은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당시 1만5000여 명이 살고 있던 다도면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피해가 컸다. 산으로 둘러싸인 다도면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빨치산들의 거점이 됐다. 빨치산은 우익인사 가족을 죽창으로 찌르고 돌로 때려 죽였다. 토벌작전에 나선 군경은 무고한 주민을 빨치산 부역자로 몰아 집단 사살했다. 서로 보복이 반복되면서 마을마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박 씨와 홍기축 다도양민희생자유족회장(62) 가족도 희생양이었다. 박 씨 아버지와 형은 인민군으로 위장한 경찰에게 ‘동무’라고 잘못 말했다가 현장에서 사살됐다. 홍 회장의 숙부는 반공단체 회장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함께 좌익 청년들에게 끌려가 야산에서 살해된 뒤 암매장됐다.

강미례 씨(80·여)는 군경 합동작전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다가 5개월 된 아들과 시아주버니, 시누이 등 3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다리와 어깨 등에 총탄 12발을 맞고 기적처럼 살아난 강 씨는 전쟁 소리만 들으면 넌더리가 난다고 했다. 그는 “업고 있던 핏덩이 때문에 내가 살았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후손들이 손잡았으니 영혼들도 화해할 것”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 다도면에서 진상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 사이에 104명이 좌익 인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176명이 군과 경찰에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유족회는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확인한 280명에 행방불명된 94명까지 포함해 위령비에 374명의 이름을 새겼다.

○ 용서와 화해

좌우익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50년이 넘도록 공개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면서도 금기(禁忌)였다. 군경에 희생당한 유족들은 아예 입을 닫고 살았다. ‘빨갱이 가족’이란 말을 듣지나 않을까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유족들 사이에 갈등의 골도 깊었다. 6·25 참전용사인 박종백 씨(85)는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누가 밀고자이니 본때를 보여야 한다거나 누구 집안과는 절대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며 “이꼴 저꼴 보기 싫다며 고향을 등진 사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용서와 화해의 물꼬는 5년 전 지역 유지들이 텄다. 이들은 “이제 와서 좌우가 무슨 소용이냐”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털고 가자고 유족들을 설득했다. 비극의 씨앗이 좌우익 대립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기록해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자며 유족들과 함께 ‘양민학살 진상조사 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이를 계기로 좌우를 아우르는 유족회가 만들어졌다. 2006년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낼 수 있었다.

당숙 일가족 9명이 빨치산에게 희생당한 홍정희 씨(77)는 “가해자도 희생자도 역사 앞에서는 모두 피해자라는 생각에 손을 맞잡았다”며 “후손들이 서로를 용서했으니 죽은 영혼도 이제 화해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유족회는 위령비 건립을 위해 회원들에게 1000만 원을 걷고 나주시로부터 3000만 원을 지원받아 다음 달 하순 제막식을 갖는다. 홍 회장은 위령비를 제작하면서 업체에 특별한 주문을 했다. 제단 앞쪽에 계수나무 잎과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새겨 달라고 부탁했다. “계수나무 잎과 두 손은 평화를 염원하고 좌우 구분 없이 희생자 모두를 기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홍 회장은 “이념 대립으로 찢긴 마을공동체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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