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강국, 그 경쟁력의 뿌리를 찾아서]<2>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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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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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도 음악 - 미술 배우듯” 英 7~16세 학생 의무수업

“디자인은 상식이고 교양
상품보는 안목도 길러줘”

■ 리처드 그린 D&T 협회장


영국 중등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에 ‘디자인&테크놀로지’라는 필수 과목이 생긴 것은 1989년이다. 디자인&테크놀로지 과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1975년 마련된 커리큘럼에 따라 목공, 테크니컬 드로잉, 섬유공예, 요리 등을 각각 별도의 과목으로 가르쳤다. ‘디자인&테크놀로지 협회’는 이런 내용을 통합한 디자인&테크놀로지 과목의 교육 방법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기관이다. 리처드 그린 협회장(52·사진)을 3월 29일 오후 런던 디자인카운슬 회의실에서 만났다.

―사서 써도 괜찮을 생활용품을 굳이 만들어보게 하는 교육이 현대사회에 필요할까.

“우리는 뛰어난 디자이너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배우는 것이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서인가? 미술을 배우는 것이 화가나 조각가로 대성할 인물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디자인은 상식이고, 학교는 상식을 알려주는 곳이다.”

―디자인&테크놀로지 과목을 배워야 하는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7세부터 16세까지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 협회는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을 위해 해마다 새로운 교재와 가이드라인을 개발해 전국 6000여 명의 담당 교사에게 제공하고 있다.”

―엄격한 디자인 교육의 효과가 디자인 산업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디자인뿐만 아니라 영국의 문화적 전통은 대체로 ‘좋은 것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것에서 단점을 없애 개선하는 방식’을 따른다. 영국의 디자인 교육은 나쁜 디자인을 솎아낼 줄 아는 현명하고 센스 있는 소비자를 길러낸다. 다수의 소비자가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시장에서 디자인 산업이 발전 못할 리 없지 않나.”그래픽-요리 주제별 수업-재학중 작품 DB화 등
학교 특성 맞게 수업… 박물관도 디자인 교육 한몫


짝 날을 세운 붉은색 손도끼.

록밴드의 뮤직비디오 DVD 박스세트 겉면 액세서리로 이보다 더 강렬하면서 유머러스한 게 있을까. 3월 31일 오전 영국 런던 서남부의 멜턴 시. 레코드점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제품은 판매용이 아니다. 만든 주체도 음반회사가 아니다. 록밴드 ‘이머전시(Emergency·긴급 상황)’의 이 기획음반 케이스는 멜턴 시내 중등학교 러틀리시스쿨 학생인 애런 아크워 월터스 군(16)이 ‘디자인&테크놀로지’ 수업의 프로젝트 과제로 만든 작품이다. 월터스 군은 “이 밴드의 앨범을 계속 수집한다면 집에 따로 망치, 방독면 등 비상용 소도구 상자를 장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웃었다.

요리도 ‘디자인’한다

한국 학생이라면 하루 종일 학교, 학원, 도서관을 오가며 책과 펜을 손에서 놓을 짬이 없을 나이. 그러나 월터스 군은 매주 2시간씩 디자인&테크놀로지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으면서 한 학기에 두 개씩 새로운 창작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 러틀리시스쿨은 직업학교나 예술전문학교가 아니다. 월터스 군이 직업훈련 특별반 학생인 것도 아니다. 그 또래의 모든 영국 학생은 누구나 디자인&테크놀로지 수업을 월터스 군만큼 받는다.

학생들에게 CD와 향수 등 다양한 제품의 포장 디자인을 가르치는 조 한 씨(31)는 “학생들의 조악한 수작업 제품이 보잘것없게 보일 수 있지만, 저마다 독특하게 고안해 낸 콘셉트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통해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고방식과 자질을 알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디자인&테크놀로지 수업 주제는 그래픽, 제품, 전기기기, 음식 네 가지로 나뉜다. 한 씨는 제품과 전기기기 수업을 맡는다. 그래픽 분야를 가르치는 레스 존슨 디자인학과장(62)은 런던에서 ‘이퀘이터 인터내셔널’이라는 디자인 마케팅 회사를 20년 넘게 운영해온 실무 경력자다. “음식 디자인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존슨 학과장은 “말 그대로 팬케이크, 케밥, 스프링롤 등 여러 가지 요리를 ‘디자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음식이 어떻게 디자인의 대상이 되느냐고요? 반대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세상에 디자인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저기 교실 벽에 걸려 있는 아주 단순한 사각형의 화이트보드 구석구석에도 수많은 디자인 요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숨어 있죠. 사람의 생활에 쓰이는 모든 사물은 디자인을 필요로 합니다.”

평생 남는 ‘디자인 성적표’

이날 오후 찾아간 런던 동남부 켄트 시의 레이븐스우드스쿨에서는 러틀리시스쿨과는 다른 방식의 디자인&테크놀로지 수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정보기술(IT) 업체 직원처럼 캐주얼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교사 세 사람이 각종 전자기기가 완비된 프레젠테이션 룸에서 수업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디자인학과장인 스펜서 허버트 씨(45)가 영상기기 전원을 올리자 학생 개개인의 디자인 학습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메뉴 화면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이 학교의 모든 디자인 교육은 종이 없이 컴퓨터로만 이뤄집니다. 5년 전부터 관련 자료를 모두 서버로 옮겨 관리하고 있어요. 학생들은 입학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디자인 히스토리를 개별 폴더를 통해 관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졸업생을 포함해 학생 2000여 명의 디자인 학습 성취 데이터가 학교 서버에 축적됐습니다.”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처음 자신의 컴퓨터로 내려받은 개인 디자인 폴더에는 앞으로 공부하면서 채워야 할 빈 페이지가 구획돼 있다. 수업에 따라 주어진 프로젝트를 하나씩 완성해 가면서 이 빈 페이지를 채워 나가는 방식이다. 페이지마다 콘셉트 추출 과정, 평가와 토론, 수정 내용이 기록돼 일목요연한 포트폴리오가 자연히 정리된다.

이 프로그램과 인트라넷 시스템을 만든 교사인 데이비드 심슨 씨(36)는 “졸업생이 대학이나 직장에서 이 자료가 필요할 때는 학교 서버를 통해 언제든 포트폴리오를 내려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생활에 ‘바로 쓰는’ 교육

런던 시내 크롬웰 로드의 공예박물관인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도 학생들을 위한 디자인 교육에 한몫하고 있다. 청소년과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둔 것은 세계 여느 박물관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독특한 것은 영국의 디자인&테크놀로지 커리큘럼을 총괄 관리하는 교육기관인 ‘디자인&테크놀로지협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해마다 협의한다는 사실이다.

3월 30일 이곳에서 만난 카라 윌리엄스 교육담당 매니저(32)는 “이곳은 미래의 디자인에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 세계 전통 공예의 흐름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라고 말했다.

“영국 디자인 교육의 목적은 일상용품을 효율적으로 선택하는 도구로 디자인 능력을 활용하는 데 있습니다. 별로 거창한 게 아니에요. 슈퍼마켓에서 칫솔을 살 때 가장 좋은 상품을 수월하게 고를 수 있도록 돕는 거죠. 박물관에서의 훈련도 그런 ‘디자인 눈썰미’를 기르는 과정입니다.”
“장애인 위한 디자인 장애인도 참여해야”

소수 눈높이 맞춘 英 공공디자인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이란 대중을 위해
만든 ‘평이한 디자인’을 뜻하는 말일까. 최소한 영국에서는
아니다. 최근 이곳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공공디자인 경향은
그 정반대의 의미를 지향한다.
‘신체적 결함 등에 의해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받는 특별한
소수에게 눈높이를 맞춘 디자인’. 이것이 최근
영국 공공디자인의 핫(hot) 콘셉트인 ‘인클루시브(inclusive·
포괄적인) 디자인’의 요체다. 정말 대중이 수월하게
쓸 수 있으려면 장애뿐 아니라 성별, 연령, 인종, 문화적 배경 등
모든 경계를 ‘지워낸’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국 디자인 정책의 요람인 런던 ‘디자인 카운슬’.
3월 29일 오후 찾아간 이곳의 2층 로비에서
인클루시브 디자인에 대한 관심의 크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홍보전시용 벽면 전체를
병원에서 쓰는 외상 환자용 보조용구의
디자인 프로젝트로 가득 채운 것.
인클루시브 디자인 전문가로 디자인 카운슬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디자인업체 ‘와이어’의 존 코코란 대표는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장애 등으로 차별 받는 사용자를
‘위해서’ 만든 디자인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형태는 장애인이
디자인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죠.
제 프로젝트 팀에는 거의 모든 경우 장애인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상상’해서 만든 디자인과는
근본적으로 품질이 다를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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