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피아노학과 첫 시각장애인 김상헌씨의 첫 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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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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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환해요”
디지털 파일로 납본된 대학교재
점자단말기로 읽고 숙제… 예습까지

“앞이 캄캄해요”
‘파일 납본’ 태부족에 다음 학기 어떻게…
귀 쫑긋 세워도 단어들 머릿속에서 흩어져

서울대 음대 피아노학과에 재학 중인 시각장애인 김상헌 씨가 12일 서울대출판사가 제공한 디지털 파일을 이용해 교양국어를 점자단말기로 읽고 있다. 변영욱 기자
서울대 음대 피아노학과에 재학 중인 시각장애인 김상헌 씨가 12일 서울대출판사가 제공한 디지털 파일을 이용해 교양국어를 점자단말기로 읽고 있다. 변영욱 기자
교실에 앉아는 있지만 ‘들러리’가 된 것만 같았다.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이 교재를 보며 문제를 풀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마디라도 더 들어보려 애를 썼지만 수많은 단어는 금세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올 3월 서울대 음대 피아노학과에 입학한 김상헌 씨(19).

그는 학기 초에는 서울대에 입학하게 된 기쁨보다도 과연 대학생활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고교 때까지는 학습서가 점자형태로 갖추어져 별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 입학 이후부터 시각장애인들이 자료 부족으로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난해 9월 도서관법이 개정됨에 따라 3월 중순부터 책 본문을 디지털파일로 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도서관법에 의하면 국립중앙도서관 장애인도서관 지원센터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독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출판사에 디지털파일로 납본(納本)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 자원봉사자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점자책을 만들거나 낭독해 녹음할 필요가 없이 디지털파일을 소리 또는 점자변환프로그램으로 돌려 불과 몇 시간 안에 촉각 또는 청각도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개정도서관법에 따라 올해 1월 디지털파일 형태에 대해 고시한 후 장애 대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59개 출판사에 155종의 서적에 대한 디지털파일 납본을 요청했다. 고시하고 120여 일이 흐른 지금까지 납본된 디지털파일은 총 58종. 상헌 씨는 이 같은 개정 도서관법의 첫 수혜자다.

서울대출판사에서 ‘교양국어’의 디지털파일을 납본해 상헌 씨는 3월 중순부터 교양국어 수업은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받을 수 있게 됐다. 디지털파일을 점자단말기를 통해 재생해 언제 어디서든 점자로 교재를 공부할 수 있다.

“디지털파일을 제공받아 단말기로 다른 아이들처럼 숙제도 해 가고, 예습도 하고 행운이죠.” 하지만 모든 과목이 다 교양국어처럼 디지털파일이 제공된 것은 아니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6개 과목 중 실기 한 과목을 제외한 5개 과목에서 교재를 사용 중인데 이 중 완전히 교재가 제공된 것은 교양국어 하나밖에 없다. 3개 과목은 그나마 출판사와의 협의를 통해 일부파일이라도 제공되지만 1개 과목은 아예 협조가 되지 않아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당장 다음 학기 수업도 상헌 씨에게는 걱정이다. “다음 학기에는 몇 과목이나 파일을 제공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쉽지 않겠죠?”

도서관법이 개정됐지만 모든 출판사가 적극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상당수 출판사는 파일이 유출되면 사본(寫本)이 만들어져 시중에 유통될까 봐 협조를 꺼린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대학교재 디지털파일 납본을 요청받은 출판사 59곳 중 7곳이 이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영숙 사무관은 “개정 도서관법 시행 초기이다 보니 아직까지 출판사들의 인식에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책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및 중증장애인들은 약 35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을 위해 제공되는 점자나 녹음도서 등은 연간 총출판물 5만여 종 중 2000여 종에 불과하다. 또 제공되는 대부분의 책이 내용을 일일이 입력하거나 녹음해 제작하기 때문에 보통 제작에 3개월 이상이 소요되며 그나마 대부분 중고교 학습서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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