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뭘 먹고 이렇게 안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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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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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다리는 루저”… 학교까지 병들게하는 키 지상주의

《최근 한 지상파 방송 오락프로그램에 나온 여대생이 “키 작은 남성은 루저(loser·패배자)”라고 발언해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사회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키 지상주의’가 한 여성의 입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키로 우열을 가리고, 키 작은 남자들을 사회적 패배자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이미 확산됐다. 키 지상주의로 인한 왜곡된 자화상은 가정과 학교 현장 곳곳에서 포착된다. 키가 ‘권력’이고 ‘능력’이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서 아이들이 상처받고 있다.》

“다리가 짧아 불쌍하다”
피구-배구할 땐 “다른 팀 가라”
가슴 찌르는 말들 예사로

인기척도는 성적-성격? 외모!
키높이 실내화-깔창 등 대박
고가의 성장호르몬 맞기도


서울의 한 고등학교 2학년 ○반. 최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인기 남학생 1, 2, 3위는 공교롭게도 키 175cm 이상인 학생들이 차지했다. 반면 여학생들과 키가 비슷한 남학생들에게 친구들은 “루저”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인기투표에선 이렇듯 성적이나 성격보다 외모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반의 A 군에게 ‘키 높이 깔창’은 필수품이다. 운동화 속에 3cm 높이 깔창을 깔아야 또래들과 키가 비슷해지는 A 군은 교실에서도 깔창을 깐 운동화를 벗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설계된 노래방에도 A 군은 가지 않는다. 반 정원 35명인 A 군의 반에서 절반 이상의 남학생이 깔창을 사용하거나 가지고 있다.

A 군과 같은 남학생이 적지 않다보니 학교 앞 문구점엔 1cm부터 3cm까지 높이가 다른 깔창이 구비돼 있다. 키 작은 남자친구를 위해 깔창을 선물하는 여학생도 있다.

깔창은 키 작은 남학생들이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다. “뭘 먹고 이렇게 안 큰 거니?” “키 좀 커라”는 비난은 차라리 일반적인 경우에 속한다. 짓궂은 여학생들은 “동생처럼 귀엽다”면서 키 작은 남학생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키 작은 친구에 대한 장난은 체육시간 극에 달한다. 전력질주를 해 8단까지 쌓아올린 뜀틀을 넘는 찰라, 철봉에 오래 매달리거나 턱걸이를 하기 위해 철봉을 향해 손을 쭉 뻗는 찰라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다리가 짧아서 불쌍하다” “팔을 다 뻗은 거냐”는 조롱들을 쏟아낸다.

농구, 배구처럼 키가 큰 학생이 유리한 게임을 편을 갈라 진행할 때 키 작은 학생들은 서로 “다른 팀으로 가라”는 친구들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아무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른바 ‘깍두기’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예 아프다는 핑계로 체육시간 운동장으로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 발끈한 남학생이 장난을 치는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선생님이 진화에 나서도 이런 장난은 잦아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 학부모 때문에 선생님들도 조심(?)하는 상황이다. 뒷자리에 앉은 학생이 “키 큰 학생이 앞에 앉아있어 안 보인다”고 말해와 그 학생을 앞자리에 앉히면 “왜 키순으로 앉히느냐”는 학부모의 항의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아이가 상처 받지 않게 키가 작아도 중간쯤에 앉혀 달라”는 민원성 전화도 온다.

사실 키에 대해 자녀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학부모다.

초등학교 6학년 최모 군은 반 1등을 도맡아 한다. 올해엔 전교회장으로 선출됐다.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으로 친구도 많다. 올 겨울방학 최 군의 목표는 ‘키 155cm까지 크기’다. 최 군의 어머니 B 씨가 정해준 목표다. B 씨는 최 군에게 “목표를 달성하면 최신 휴대전화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최 군이 시험공부 때문에 오전 1시까지 책을 붙잡고 있으면 어머니 B 씨는 “일찍 자야 키가 큰다”며 공부방의 불을 끈다. B 씨는 아들이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기 위해 공부방 형광등의 조도를 조절하는 스위치를 ‘최하’ 단계에 맞춰 놓는다.

또 다른 엄마 C 씨는 ‘키’ ‘성장’에 관한 TV프로그램은 빠짐없이 시청한다. 중2 아들과 중1 딸 때문이다. 키 크는 법에 대한 신문기사가 나오면 가위로 오린 뒤 아들의 책상머리 앞에 붙여둔다. 직장에 다니는 C 씨는 엄마들과의 모임은 빠짐없이 참석한다. 요즘 엄마들의 관심사는 딱 두 가지다. ‘성적 올리는 법’과 ‘키 키우는 법’.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키가 작으면 ‘무시’당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최근 모임에선 한 엄마가 자녀에게 고가의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C 씨는 올 겨울 아들의 손을 잡고 성장 클리닉에 가 상담을 받아볼 생각도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엄마 D 씨는 “대입에서 실패하면 재수하면 되고, 못생긴 얼굴은 성형하면 된다. 하지만 키는 때를 놓치면 손 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심리 때문에 특수를 누리는 산업도 있다. 다리가 길어 보인다는 교복, 걸음을 걸을 때 다리에 꼭 필요한 자극을 줘 성장을 돕는다는 운동화는 폭발적 매출을 기록했다. 일반 실내화보다 5배가량 비싼 ‘키 높이 실내화’도 불티나게 팔린다. 신학기, 방학 때면 키 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성장 클리닉, 한의원, 어린이 전용운동클럽에 학생과 학부모가 몰린다.

한 중학교 교사는 “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이 많다보니 신체검사를 할 때도 키만큼은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에서 한 명씩 재고 나오도록 하고 있다”면서 “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교우관계는 물론 성적까지 하락하는 학생을 보면 세상이 크게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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