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가르기 문화 심각… 합리적 토론 불가능”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홍난파 친일명단서 보류’ 가처분신청 승소 이끈 정희준 난파기념사업회 이사
“암흑시대 힘들게 저항한 분들 살아남았다고 친일파 낙인”

“민간단체도 아닌 대통령 소속 국가기관이 우리 사회의 ‘주홍글씨’나 다름없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한다는 발상부터 이해하기 힘듭니다.”

29일 만난 난파기념사업회 정희준 이사(70·사진)는 인터뷰 내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규명위)의 친일 청산논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고향의 봄’, ‘봉선화’ 의 작곡자인 홍난파(1898∼1941)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규명위의 결정에 반발해 미국에 있는 난파 후손의 동의를 받아 ‘친일 여부를 법원에서 가릴 때까지 친일명단에 포함시키는 것을 보류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 신청을 받아들여 규명위의 친일명단에서 난파의 이름은 일단 빠졌다.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 덕에 급한 불은 껐지만 본안소송에서 이길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기념사업회와 후손 등은 난파가 일본군가 등을 작곡했고 친일관변단체의 위원으로 재직했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내린 규명위를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규명위의 활동기한이 30일로 끝나기 때문에 설령 소송에서 진다고 해도 추가로 친일명단에 들어갈 가능성은 낮지만 규명위의 조사 과정에서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모금을 해서라도 소송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음악가나 화가, 문인들 같은 예술가의 행적까지 획일적인 친일 잣대로 판단하는 규명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난파는 미국 유학 시절 바이올린을 판 돈으로 항일 운동을 도왔을 뿐더러 애국단체인 흥사단에도 가입한 인물입니다. 북한 음악계에서도 위대한 민족 음악가로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국에 와서 감옥까지 다녀온 뒤 작성한 ‘사상전향서’와 친일단체의 위원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 때문에 친일파로 낙인 찍혔습니다.”

그는 경기 화성시에 있는 난파의 생가를 정비하고 유물 전시실 등을 건립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는 난파생가지역정화추진위원회 위원장도 겸하고 있다. 그는 “친일 시비로 인해 난파의 생가 정비사업에도 큰 차질을 겪었다”며 아쉬워했다. 친일 논란이 벌어지자 ‘친일파에게 예산을 줬다’는 여론의 비난을 우려한 역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예산 배정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정 이사는 규명위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와 편 가르기 문화에 참담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난파를 친일파로 결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규명위 위원을 만나기도 했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특정 이념과 사상의 노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꽉 막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 난파의 생애를 변호하러 나갔다가 한 참석자에게 ‘친일파를 옹호하는 사람도 친일파 아니냐’는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난파의 이름을 수록했다.

정 이사는 “난파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분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민족의 역량을 키우며 힘들게 저항한 분들이 많다”며 “부실하고 편향된 조사를 토대로 이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김대중 정부 때 시작돼 노무현 정부 집권기를 거치면서 이어져 온 ‘대한민국 정통 세력에 대한 정치적 축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비판했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