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칼바람속 꿈쩍도 안해… “아저씨, 눈 좀 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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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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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센터 직원과 살펴본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
민원으로 지하도 잇단 폐쇄… ‘응급 잠자리’도 턱없이 부족
노숙 취약층들 갈곳 잃어… 센터 입소 거부자 대책 절실

서울시가 겨울철을 맞아 노숙인 거리 상담 인원을 2배로 늘리며 노숙인 시설 입소에 힘쓰고 있다. 19일 밤 상담원들이 서울역 지하도에서 몸이 불편한 노숙인들에게 상담을 권유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서울시가 겨울철을 맞아 노숙인 거리 상담 인원을 2배로 늘리며 노숙인 시설 입소에 힘쓰고 있다. 19일 밤 상담원들이 서울역 지하도에서 몸이 불편한 노숙인들에게 상담을 권유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아저씨, 잠깐만 일어나 봐요. 다리 움직여지세요?”

19일 오후 9시 서울역 인근 염천교 지하도 입구. 입김이 나오는 영하의 날씨에 종이박스만 깔고 누워있는 노숙인에게 노숙자 지원센터인 ‘다시서기’ 소속 마명철 상담원이 말을 걸었다. 가스 흡입 중독 증세를 보이는 35세의 이 노숙인이 힘겹게 눈을 뜨고 손을 들어 보이자 상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숙인은 이달 3일 폐쇄된 염천지하도를 떠나지 못하고 철문으로 막힌 야외 계단 앞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인적이 끊긴 지하도 계단에는 치우지 않은 은행잎만 수북했다.

○ 실내 공간 거부하는 외톨이 노숙인

계절에 관계없이 서울역 인근에선 노숙인 300여 명이 삶을 이어간다. 이 중 200여 명은 난방이 되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잠을 청하지만 나머지는 자리가 남는데도 굳이 야외에서 밤을 보낸다. 일반인의 상식에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이 추운 날씨에도 굳이 바깥을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성이 부족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정신질환 및 알코올의존증 등을 앓고 있다. 한 공간에 여럿이 함께 자는 서울역 대합실은 이들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때론 두려운 공간이다. 서울시에서 권유하는 노숙인 보호 쉼터나 센터 생활은 더욱 상상할 수 없다. 다시서기센터는 이들을 노숙인 중에서도 최하층으로 규정하고 ‘위기 노숙인’으로 관리한다.

위기 노숙인들이 그나마 사람을 피해, 그리고 바람을 피해 몸을 숨기는 곳은 시내 지하도. 매년 겨울철이면 서울역 인근 지하도마다 20∼30명씩 모이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거리 미관 관리 차원 및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지하도가 잇달아 폐쇄됐기 때문. 노숙인들이 모여 살던 남대문 지하도는 추석 이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남5가 지하도도 지난해 말 폐쇄됐다. 서소문공원 뒤 좁은 반지하 움집 단지도 공원 앞에 고급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서면서 밀려났다.

○ 추운 겨울, 노숙인 대책은 미지근

이날 들른 서소문공원에선 얼핏 봐선 노숙인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깔린 산책로를 벗어나 수풀 사이로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담요 밖으로 코까지만 내놓은 채 누워 있는 노숙인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추위를 피하려고 자기 몸을 이불과 함께 노끈으로 묶어 마치 시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전까지 움집에서 살던 노숙인 중 일부라고 했다. 상담원들은 어렵게 잠든 노숙인들이 깨지 않도록, 숨을 쉬는지 살그머니 확인한 뒤 순찰을 계속했다.

서울시는 15일 겨울철 길거리 노숙인을 보호한다며 센터 입소 지원 및 응급 잠자리 마련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현장에선 노숙인들이 센터를 거부하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내놓은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응급 잠자리로 제공된 쪽방 10칸도 전체 서울 시내의 노숙인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불만도 있다. 쪽방으로 긴급 피신하더라도 식사는 제공되지 않는다. 위기 노숙인들이 새벽이면 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이유다. 서울역 인근에서 1년 반 동안 상담해왔다는 한 자원봉사자는 “무조건 눈앞에서 밀어낸다고 해서 노숙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들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수현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무조건 노숙인 시설 입소를 권유하기보다는 정신질환이나 알코올의존증 문제가 있는 경우는 따로 분류해 전문 사회복지시설을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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