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들아 오늘만은 비켜다오”

  • 입력 2009년 9월 21일 02시 56분


코멘트
1960년대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던 밤섬의 모습(위). 밤섬보존회와 마포문화원은 19일 서울 마포구와 영등포구 사이에 걸쳐 있는 밤섬에서 실향민 귀향제를 열었다. 100여 명의 실향민이 모인 가운데 용궁제와 밤섬 도당굿이 이어지고 있다(아래). 사진 제공 마포구·연합뉴스
1960년대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던 밤섬의 모습(위). 밤섬보존회와 마포문화원은 19일 서울 마포구와 영등포구 사이에 걸쳐 있는 밤섬에서 실향민 귀향제를 열었다. 100여 명의 실향민이 모인 가운데 용궁제와 밤섬 도당굿이 이어지고 있다(아래). 사진 제공 마포구·연합뉴스
62가구 살던 한강 밤섬… 옛 주민들, 추석 앞두고 ‘4년만에 귀향’

“지금이야 철새들이 주인이지만, 예전에는 우리가 밤섬에서 잘살았는데….”

밤섬보존회 김공선 총무(77)가 배에 오르며 혼잣말을 했다. 19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한강시민공원 망원지구 나루터. 김 씨 옆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 100여 명이 조금은 불편해 보이지만 제법 빠르게 배에 올랐다. 배의 목적지는 철새의 낙원인 밤섬. 노인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야 서슬 퍼렇던 시대였고 우리도 어렸으니 고향땅을 떠나는 것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였지.” 김 씨의 말을 들은 노인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전 10시 반. 밤섬 실향민들은 고향땅 밤섬을 4년 만에 다시 밟고 추석맞이 귀향제를 열었다.

○ 1968년 여의도 개발 위해 밤섬 폭파

현재 밤섬은 철새들이 주인처럼 살고 있는 무인도지만 원래 사람이 살았다. 500여 년 전 밤섬에는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마포나루터가 번성하면서 밤섬 주민은 점차 늘어나 1960년대에는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생활했다. 하지만 1968년 밤섬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당시 여의도 개발에 나선 정부가 밤섬을 폭파시켰기 때문. 밤섬의 모래와 자갈은 여의도 주변에 제방을 쌓는 데 쓰였다. ‘밤섬 실향민’이란 말은 그때 생겼다. 실향민 대부분은 재개발이 추진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는 와우산 자락에서 이웃처럼 지냈다.

실향민들이 주축이 돼 만든 ‘밤섬보존회’와 마포문화원이 주최한 이날 행사는 용왕신에게 재앙을 막아 달라고 기원하는 용궁제와 인간문화재 김충광 씨가 주관한 밤섬 도당굿으로 이어졌다.

○ 애들은 수영, 어른들은 농사 짓던 곳

제사를 지켜보던 강성남 할머니(80)가 “그때는 밤섬에서 사는 게 세상의 전부였고, 뭍으로 나가면 못 사는 줄 알았다”며 얘기를 꺼냈다. “다들 육지가 편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고향땅을 떠나는 게 어디 쉽나. 내가 5남매를 밤섬에서 낳고 키울 때 얼마나 좋았다고. 애들은 수영하고, 어른들은 농사짓고 배를 만들었지. 막상 뭍으로 가려니 살 길이 막막했어.” 이명재 씨(76)가 이야기를 건네받아 할머니들 옆에 앉았다. 이 씨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밤섬을 왜 헐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떠나게 했더라도 섬은 폭파하지 말고 그냥 놔뒀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 생태계 보전 위해 출입통제

자연의 힘은 대단했다. 폭파 뒤 10개의 작은 섬으로 쪼개졌던 밤섬이 1980년대부터 스스로 복원되기 시작했던 것. 한강이 퇴적물을 실어 나른 덕분에 폭파 당시 면적이 5만8000m²(약 1만7500평)였던 밤섬은 현재 24만1490m²(약 7만3000평)에 이른다. 섬이 커지고 갈대숲과 버드나무가 자라면서 철새들도 모여들었다.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은 밤섬은 철새들이 겨울을 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섬이 커지고 나무와 새들도 돌아왔지만 밤섬 실향민들은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밤섬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가 199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고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 결국 실향민들은 서울시 허가를 얻어 2003년부터 2년마다 한 번씩 고향을 떠난 아쉬움을 이렇게 달래고 있다. 2007년에는 날씨 때문에 뭍에서 귀향제가 열렸다.

귀향제가 끝나고 점심을 먹은 실향민들은 옛 밤섬 사진을 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가물가물한 기억은 퍼즐 맞추듯 이야기를 통해 하나씩 엮어졌다. “이쪽이 모래사장 아니었나? 우리가 수영하던 곳 말이야.” “아니야. 모래사장은 저쪽이었지. 우리 집은 이쪽에 있었고. 그런데 그때 그 모습이 지금은 하나도 없네그려.”

귀향제는 반나절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밤섬 이야기는 배를 타고 떠날 때까지도 끝날 줄 몰랐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