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핀 ‘무궁화’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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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경위 근속승진제’ 곳곳서 후유증

경찰 4명 중 1명 경위
항아리형 기형적 조직
‘후배가 팀장’ 직책 역전도
출동지연등 치안공백 우려

충남 모 지구대에 근무하는 정모 경위(55)는 12년 전 어깨에 무궁화 계급장을 처음 달았던 날이 생생하다. 스물다섯에 순경으로 시작해 19년 만에 꿈에 그리던 간부급인 경위(6급)가 됐다. 경위 진급 이후 파출소장만 다섯 번, 파출소가 지구대로 개편된 뒤에는 지구대 팀장도 두 번 거쳤다. 하지만 그는 올해 2월 파출소장에서 초소장으로 ‘강등’됐다.

2006년부터 경사 8년이면 자동으로 경위로 승진하는 ‘경위 근속승진제’가 도입된 뒤 경위 수가 많아지면서 생긴 일이다. 12년 전 그가 파출소장을 할 때 순경이었던 후배가 경위로 승진해 지구대 팀장이 됐다. 요즘 정 경위는 하루 한 번씩 초소에 순시를 오는 후배에게 특이사항을 보고한다.

정부가 경찰 하위직의 사기 진작을 위해 도입한 근속승진제 때문에 경찰 계급구조가 기형화되고 있다. 2006년 4020명이 경위로 근속승진한 데 이어 이후 해마다 4000명 이상이 경위로 승진해 현재 경찰 4명 중 한 명이 경위 계급일 정도로 경위가 늘었다. ‘일할 맛 안 난다’는 경찰 하위직의 불만이 쏟아지자 정부는 경위 승진의 문을 넓혔지만 도입 당시 우려됐던 경찰 조직의 혼란과 이로 인한 치안 공백 등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경위는 2만6531명으로 전체 경찰(9만9149명)의 26.8%에 달한다. 법정 정원 1만1694명보다 두 배 이상 많다. 경위는 늘어났지만 경감 이하 계급의 연령 정년이 57세에서 60세로 연장되면서 경감 승진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2005년 546명이 경감으로 승진한 이후 계속 줄어들어 지난해에는 355명, 올해는 상반기(1∼6월)까지 161명만 경감으로 승진했다. 이 때문에 경찰 조직은 허리는 볼록하고 위아래는 잘록한 항아리형 구조로 바뀌었다.

경찰 조직이 기형화되면서 치안에도 구멍이 생겼다. 지구대만 해도 경위 팀장 밑에 경위 팀원이 수두룩해 지시에 잘 따르지 않거나 출동이 늦어져 치안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구 북부경찰서 산하의 한 지구대에 근무하는 C 경위는 “전체 직원 55명 중 경위 경사가 각각 20명이고 경장은 10명, 순경은 4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솔직히 대부분 간부라고 생각하니 말발이 서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 한 지구대의 팀장은 “현장을 뛰는 하위직 대신 40대 이상 경위 팀원이 많아지면서 경찰이 굼떠져 사건현장에 제대로 출동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고 털어놨다.

지방의 한 지구대는 80명 중 경위가 43명이나 되는 곳도 있다. 이 지구대에 근무하는 한 경위는 “팀마다 경위 팀장 밑에 경위 순찰요원이 10여 명인데 지휘권을 제대로 세우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년 전 경기 성남시 분당경찰서 산하 야탑지구대에서는 경위 팀원이 “경사와 함께 일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며 경위 팀장에게 항의하다 하급자인 경사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감 승진 기회를 넓혀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윤석 의원(민주당)은 지난해 12월 경위 10년이면 경감으로 근속승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경찰공무원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경감 근속승진제를 도입해도 경위 적체에 따른 지휘체계 혼선이 똑같이 경감급으로 옮겨갈 수 있다”며 “계급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려고 다른 계급을 늘리는 방식은 치안이 흔들리는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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