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은 피하고 잡니다만…”

  • 입력 2009년 8월 27일 02시 54분


낮엔 막노동, 밤엔 PC-만화방… 떠도는 준노숙인들
서울역-영등포역 주변 수십명씩 한방서 새우잠
일당 받으면 쪽방서 단잠 “하루 벌어 하루 살아요”

25일 0시 서울역 인근의 한 PC방. 80여 석 중 50석가량이 찼지만 그중 10여 명은 의자에 길게 누운 채 자고 있었다.

“내일 일 나가? 요즘 수원에 일자리가 많다는데 같이 안 가려나?”

인터넷 포커게임을 하던 최모 씨(41)가 옆자리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근 인력사무소에 나가며 막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하는 최 씨와 동료들의 집은 이곳 PC방이다. 이 PC방 선불카드에 15시간을 충전하면 1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대략 이틀을 지낼 수 있다. 거리에서 잠을 자지 않으니 노숙인은 아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근로의지가 꺾이면 노숙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준노숙인’이다.

최 씨의 동료 조모 씨(38)는 4년 전까지 서울 충무로의 인쇄공장 기술자였다. 박모 씨(34)는 외환위기 전까지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의 원단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이 문을 닫고 4년여 간 전세, 월세방을 전전했지만 보증금마저 까먹자 PC방을 전전하는 준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역 인근 PC방 3곳, 만화방 3곳은 가게마다 30∼80명의 사람이 밤마다 이렇게 모여 들어 잠자리를 해결한다. 노숙인 관련 단체는 서울역 영등포역 인근의 준노숙인만 수백 명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이 PC방, 만화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값이 싸기 때문이다. 또 쉬면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볼 수 있으며 동료들과 일자리 정보 등도 나눌 수 있다.

“나흘 전에 여주 공사장에 갔다 왔어. 원래 일당이 7만 원인데 소개비 7000원 떼고, 교통비 떼고, 이렇게 하고 나니 5만8000원밖에 남지 않더라고.” 최 씨는 인력사무소의 수수료가 높다고 불평하며 “막노동 보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라고 말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오전 4시 반. 동료가 인력사무소에 나가자며 잠든 최 씨를 깨웠다. 근력이 좋고 성실한 사람은 인력사무소 직원이 PC방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해 일을 나오라고 한다. 막노동을 한 날에는 1만∼1만5000원짜리 쪽방에서 자며 쉬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PC방이나 인근 성공회대 다시서기센터 등 노숙인 쉼터를 찾는다. 고등학생 딸이 복지시설에서 생활한다는 조 씨는 “집 한 칸 마련해서 헤어진 딸과 같이 사는 것이 꿈”이라며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살지만 돈을 꼭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24일 새벽에는 노숙인들이 주로 묵는 서울역 인근 만화방을 찾아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만화방은 건물 2,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에서 한 층 더 올라가니 군대 내무반처럼 생긴 66m²(20평)의 수면실 2칸에서 25명의 준노숙인들이 잠을 자고 있다. 한 사람에 3.3m²(1평)도 안 되는 공간이 이들의 방인 셈이다. 국토해양부 고시 최저주거기준은 가구원이 1인인 경우 침실은 1개, 총주거면적은 12m²(약 3.6평)이지만 이들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만화방은 세탁기와 온수기 이불 등을 갖췄다. 벽의 빨랫줄과 옷걸이에는 겨울옷과 세탁한 옷, 수건들이 줄지어 걸렸다. 4000원을 내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잘 수 있다. 3∼8년을 산 만화방 ‘식구’ 20명은 한 달에 15만 원을 낸다. 아예 주민등록 주소지가 이 만화방인 사람도 있다.

선풍기 3대가 밤새 돌았지만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의 더위를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일을 하다 다친 듯 정강이에 딱지가 앉은 한 30대 남자는 기침과 잠꼬대를 되풀이했다. 그의 가슴에는 박봉성 만화 ‘강철의 승부사’가 놓여 있었다. 건너 칸에서 복도를 거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화장실의 오물냄새가 확 풍겼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기자뿐이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준노숙인 12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10명 중 3명은 비주거용 거주지에서 5년 이상 생활한 것으로 나타났다. 류정순 연구소장은 “경제난으로 해체 가구가 늘고 저소득층의 임차료 부담능력이 줄면서 비거주용 주거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저렴한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남기철 교수는 “PC방에서 자고 아침에 공용화장실에서 씻고 일하러 가는 사람들도 노숙인이나 마찬가지”라며 “서민촌이 재개발로 줄어들면서 준노숙인 수가 늘고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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