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민권 지름길” 한인 美軍지원 열풍

  • 입력 2009년 6월 17일 03시 00분


빠르면 6개월에 시민권

취업난 시달리던 유학생 등

올들어 4000명 넘게 몰려

《김모 씨(30)는 7년 전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며 학업에 매진한 끝에 올해 미국 동부의 한 명문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2009년 미국의 경제상황은 사상 최악. 졸업 전 몇몇 미국 기업에서 러브 콜을 받았지만 지금은 모두 보류된 상태다. 졸업 전에 취업한 많은 동기생도 올 들어 직장을 잃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까운 데다 한국의 건설경기 역시 나빠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 무렵 김 씨는 외국인에게도 미군 입대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대학원과 군대를 놓고 고민하다 ‘힘은 들겠지만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판단으로 6월 미군에 입대했다.

○ 급여 연간 3만 달러

외국인에게도 입대를 허용하는 국익필수요원 군 입대 프로그램(MAVNI)이 미국 현지 유학생과 한인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미국 현지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관련 문의 글이 쏟아지고 있고 주요 포털 사이트에는 아예 이 프로그램 정보만을 다루는 카페도 개설됐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5월 29일자에 “2월 23일부터 890명을 선발하는 모병 프로그램에 무려 8000여 명이 지원했으며 그 가운데 한인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모병소의 정동구 중사는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 지원자가 전체 지원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MAVNI 프로그램은 지난해 말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랍어나 페르시아어, 한국어 등에 능통한 이민자들의 군 입대를 유도하기 위해 만든 임시 프로그램. 모집 병력은 한국어를 포함한 35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특수언어구사 부문 557명과 의료 부문 333명 등 총 890명. 복무기간은 통역 병력이 4년, 군의관과 간호사 병력이 3년. 급여는 본봉이 연간 2만 달러 정도지만 주택수당, 기타 보조금 등이 더해지면 3만 달러를 넘는다.

2월 말 뉴욕에 이어 5월부터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모집하고 있다. 한인들이 몰리자 뉴욕의 한인 언어구사 부문 모집을 종료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만 지원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지원자는 끊이지 않는다. 미군 로스앤젤레스 모병소 측은 “한인 지원자가 너무 많아 미군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며 “원래 지원자격이 고교 졸업 이상이었지만 이제는 지원자 중 대학 졸업 이상자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 “모집인원이 차면 모병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만큼 언제 지원 접수를 중단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 “복무 후 美서 직업 갖기도 쉬워”

복무기간이 짧지 않은데도 이렇게 한인들이 몰리는 것은 군에 입대할 경우 이르면 6개월 안에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

한국인이 미국 시민권을 따는 것은 쉽지 않다. 법무법인 한울의 이철우 변호사는 “영주권도 확실한 전문직을 가지고 있거나, 투자이민을 가는 경우에 한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발급된다”며 “영주권을 따고도 3∼5년 기다려야 시민권이 나오는데 군 복무를 통해 영주권 취득 절차 없이 바로 시민권을 딸 수 있어 이 프로그램이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MAVNI 지원을 고민하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유학생 정모 씨(24)는 “시민권자가 되면 일단 학비가 싸고 나중에 미국에서 직업 갖기도 쉬워진다”며 “어차피 군대를 갈 거라면 미군에 가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고 전했다. 미국 군대에 입대해 시민권을 취득할 경우 본인이 한국에서 장기 체류하지만 않는다면 한국 군대의 병역 의무를 피해갈 수 있으며 만 35세를 넘기면 병역 의무도 없어진다.

최근의 취업난도 미군 지원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미국에 남아도, 귀국을 해도 직장 잡기가 쉽지 않아 유학생들이 대거 MAVNI를 노크하고 있는 것. 카페 게시판에는 심심치 않게 30대의 글도 올라온다.

“힘들게 공부를 마쳤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고…절망하던 차에 가족을 위해 다시 한번 군대를 가기로 결심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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