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시 난간에 매달려도 구해주지 않는 소방관, 왜?

  • 입력 2009년 6월 8일 18시 58분


고층건물 화재시 난간에 매달린 시민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고층건물 화재시 난간에 매달린 시민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에어매트는 무겁고 설치가 복잡해 긴급상황에서 활용도가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높다. 사진=포항남부소방서
에어매트는 무겁고 설치가 복잡해 긴급상황에서 활용도가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높다. 사진=포항남부소방서
7일 새벽 4시경 경남 창원의 한 5층 빌라에 불이나 일가족 4명이 모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불가항력의 사고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부인 이 모씨(40)는 연기에 질식한 다른 이들과 달리 무려 20여 분간 창문 난간에 매달려 있었고, 2분 만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추락사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빨리 에어매트를 깔아 달라"고 요구한 이웃 주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현장 소방지휘관의 책임이 크지만 현재 소방당국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장 상황 상 현관 출입문을 통과해 구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게 당시 판단이었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불을 피해 난간에 매달린 시민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3월11일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화재 사건과 거의 흡사하다.

당시에도 불이난 아파트 주위로 소방차 12대와 소방관 60여명이 모여들었지만 소방관 대다수가 화재가 인근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이 구조를 기다리던 30대 여성은 베란다 난간에서 20여 분 간 매달려 있다가 힘이 빠져 추락사 했다. 당시 그녀의 추락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혀 안타까움을 더했지만 소방당국은 어째서 에어매트가 제 때에 준비되지 못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 화재시 에어매트와 사다리차는 무용지물?

소방방재청이 홍보하는 '고층건물 화재 발생시 대피 요령'에는 "건물 밖으로 대피하지 못하면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구조를 기다린다"는 대목이 포함돼 있다.

사실 이는 가장 합리적인 대피방법으로 대개 밀폐된 공간에서 현관 진입이 불가능할 때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는 고층건물의 증가로 인해 창문을 통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며 소방관의 적절한 조치도 기대보다 늦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층 건물 화재 시 인명구조에 활용되는 장비는 에어매트 혹은 사다리차다. 문제는 두 장비가 모두 소방관들에게는 애물단지라는 사실이다.

경원대학교 박형주 교수(50,소방시스템학과)는 "에어매트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버리라"고 주문한다.

우선 에어매트는 건장한 소방관 4명이 힘을 모아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겁고 최소 10분가량 콤프레셔로 공기를 주입해야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에어매트는 화재 현장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 구조 구난차에 실려 있을 뿐 아니라 10층 이상의 높이에서는 정확한 낙하지점을 잡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박 교수는 "에어매트는 자살 사건을 방지하는데 활용되는 게 전부일 뿐 촌각을 다투는 화재 사건에서는 민첩한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장비라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하는 소방방채청 관계자들의 의견도 대체로 비슷하다. 7일 사고 현장에서도 창원소방서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구조구난차에 에어매트가 있었지만 무게가 무겁고 설치하는데도 시간이 걸려 출입문을 개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고 아쉬워했다. 화재현장에서는 여전히 불 끄는 것이 최선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사다리차를 출동시켜 구조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문제는 사다리차 역시 애물단지로 전락한지 오래라는 점이다. 한 전직 소방관은 익명을 전제로 "사다라차는 상당히 민감한 기계이기 때문에 고장도 잦고 정확한 작동이 쉽지 않다"며 "1년 중 수개월은 수리중일 때가 적지 않고 고층 건물일 경우 바람에 쉽게 흔들려 소방관들조차도 구조 활동에 꺼리곤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건물 주변의 불법 주차 차량이나 복잡한 전선줄로 인해 사다리차가 쉽게 가동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지적도 있다. 7일 사고에서도 창원소방서 관계자는 "굴절 사다리가 있었지만 현장에 주차차량이 많고 빌라 가까이 전깃줄이 너무 복잡해 현장 접근이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무분별한 베란다 확장은 화재엔 재앙으로

결국 현실적으로는 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에는 소방관이 올 때까지 베란다나 창문에서 버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대피법이란 얘기다. 그러나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베란다를 확장하는 바람에 이 방법조차 실효성이 거의 없는 대피요령으로 전락해 버렸다. 실제 압구정동 사고의 경우 거실과 베란다를 구분하는 이중 창을 없앤 베란다 확장이 생존시간 확보에 가장 큰 방해가 됐다는 얘기다

경원대 박형주 교수는 "아파트 베란다는 화재 시 적어도 20여분 이상 버텨줄 수 있는 최후의 대피처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공간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면서 "베란다가 거의 없는 고층아파트에는 하향식 비상 사다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방법이 우리 실정에 맞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십 만 채나 되는 아파트에 비상사다리가 생기길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결국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다수의 시민들은 소방관의 발 빠른 대처에 기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소방 관계자들은 값비싼 장비 탓을 하거나 의미 없는 소방 원칙을 되뇌고 있지만, 추락사를 지켜본 시민들은 "에어매트까지 갈 것도 없이 하다못해 침대용 매트리스만 깔았어도 5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시민을 구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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