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피플&피플즈/아프간戰서 다리잃은 라흐마니씨 신라유적 탐방

  • 입력 2009년 6월 4일 06시 46분


“수천년 유적 순식간에 부수는 전쟁 끔찍”

“전쟁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갈 뿐 아니라 세계인이 공유해야 할 역사유적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하는 또 다른 슬픔을 줍니다. 한국과 북한도 최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달 30일 경북 경주시 인왕동 첨성대 앞.

1988년 아프가니스탄-러시아전쟁 때 폭격을 당해 왼쪽 다리를 잃은 아프가니스탄 출신 바시르 아메드 라흐마니 씨(23·인하대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 1년)가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첨성대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설명을 들었다”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첨성대와 비슷한 문화재가 있었는데 전쟁으로 훼손돼 일부밖에 볼 수 없어요. 전쟁이 가져다 준 상처의 흔적을 파괴된 문화재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라흐마니 씨 등 외국인 학생 20여 명은 이날 인하대 한국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석빙고, 천마총 등 역사유적을 둘러봤다.

그는 “안압지의 야경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져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다웠다”며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석굴암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잘 보존돼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역사문화 유적이 사라지고 탈레반 정권에 의해 소중한 문화재가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한 그는 역사문화 유적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2001년 3월 10일 탈레반 정권이 세계 최대 크기의 바미안 마애불의 머리를 폭파한 사건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며 “내년 말까지 복구 작업을 마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라흐마니 씨는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탈레반 군사들이 문화유적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상황이지만 언제 문화유적이 훼손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2008년 7월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돼 인하대에 입학한 그는 지금도 어릴 때 잃은 다리 부위에 통증이 있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전쟁이 나면 사람과 동물만 죽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보존해 온 문화유산이 순식간에 훼손되는 아픔을 겪는다”며 “전쟁은 언어, 생활습관, 자국의 문화도 바꿔놓는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 외국에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는데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더라는 것. 이슬람 국가들은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해 음식을 먹는 생활습관이 있다.

그는 “경주에 오기 전에 강화도를 방문해 외세에 맞서 싸우던 조선 병사들의 투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며 “한국의 역사유적 현장을 둘러보면서 문화유적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인하대는 2007년 5월부터 중국, 말레이시아, 러시아, 캐나다 등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국의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인하대 허우범 홍보팀장은 “한국의 유수한 역사를 느끼면서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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