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논리와 사고]명확한 논의

  • 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7분


명확한 논의는 명확한 개념-용어 정의에서 출발한다

‘세계화’의 경우

십인십색 의미 해석

논의 사분오열 가능성

정의 분명히 내려야

‘공통의 지반’ 확보

올바른 소통 이뤄져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논의가 명확해야 합니다. 명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앞부분에서 글이 다루는 주요 개념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먼저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의 용어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의미들은 서로 완전히 다르진 않습니다. 형제들의 생김새가 서로 닮았듯 하나의 용어가 갖는 여러 의미는 유사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같지는 않으므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용어를 사용하면 글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혼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세계화’라는 개념이 좋은 예입니다. 세계화에 대한 학생들의 논쟁을 듣다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남학생은 세계화가 부정적인 흐름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다른 여학생은 세계화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여학생 역시 일리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대립하는 주장이 왜 동시에 일리 있게 들리는 것일까요?

한 현상이 의의와 한계,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 상황에서 두 학생이 각각 한쪽 측면만을 보기 때문에 대립하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 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똑같은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르게 의미를 규정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계화를 사용하는 맥락을 검토해보면 서로 관련은 있지만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첫째, 세계화는 ‘지구촌화’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미디어 사회학자인 마셜 매클루언은 1960년대에 세계가 전자 미디어 덕분에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일반인에게도 친숙해졌습니다.

“사회관계가 세계적으로 복잡하게 얽힘에 따라 지역적 사건들도 멀리 떨어진 곳의 사건에 영향을 받고, 멀리 떨어진 지역도 서로 연관된다”고 말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도 ‘지구촌화’라는 현상을 부각시켜 세계화를 규정했습니다.

지구촌화로서의 세계화는 개인의 활동 무대가 전 지구적 차원으로 넓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 지구촌 단위의 새로운 문명이 생성될 수 있음을 기대하는 문명사적 의미도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구촌화는 ‘디지털 혁명’이라고 불리는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 전체가 실시간(real time)에 하나로 만나는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이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둘째, 세계화는 ‘세계시장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통과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할수록 각 국가의 경제는 세계 경제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화란 대내적으로는 개혁과 규제 완화, 대외적으로는 무역투자 자유화 및 세계 경제 질서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세계화를 추진했던 정부나 기업들은 세계화를 이러한 ‘세계시장화’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기업은 어느 국가에서건 세금만 납부하면 생산, 고용, 판매와 관련해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때문에 국경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세계시장화를 정당화하는 이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세계화란 경제적 국경이 없어짐으로써 경쟁이 기하급수적으로 심화되는 현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1등만 살아남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소수에게는 ‘세계정상(頂上)화’가 되지만 경쟁에서 밀린 다수의 상황은 너무나 불투명해진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셋째, 세계화는 ‘세계시민화’의 의미를 가집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 핵 문제, 빈곤 문제는 물론 민족 간의 갈등과 대립에 이르기까지 이제 인류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은 국가 단위로는 해결하기 힘든 ‘전 지구적인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이제는 한 국가의 국민 관점이 아니라 세계시민 관점에서 서로 연대하여 공동으로 대처하지 않고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가 하나의 위험공동체가 됨으로써 국가 간의 협동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시민화로서의 세계화는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하며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NGO가 세계시민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의미로 ‘세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앞서 든 예에서 남학생은 세계화를 세계시장화로 이해해 세계화에 대해 비판하고 있고, 여학생은 세계화를 세계시민화로 이해해 긍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같은 주제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소통을 위해선 우선 공통의 지반을 확보해야 합니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주요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그중 가장 중요한 작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박정하 성균관대 학부대 교수·의사소통교육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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