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는 돈은 줄고… 빚은 늘고… 가계저축률 1%대 추락

  • 입력 2009년 3월 24일 03시 04분


10년새 22%P↓… 100만원 벌어 1만원 저축하는 셈

초저금리 美-日보다 2~4%P 낮아… 세계 최저수준

자영업자인 한모 씨(44·서울 마포구)가 지난달 인건비와 세금을 떼고 순수하게 벌어들인 돈은 530만 원. 각종 대출이자, 두 딸의 학원비, 보험료, 기타 생활비 등 일상적인 지출을 빼고 나면 10만 원도 안 남는다. 한 씨는 “2006년 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뒤로는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 씨처럼 과도한 대출과 사교육비 지출 등으로 저축이 힘든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국 가계의 저축률이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실물경제실장은 “지난해는 고용 사정이 나빠지고 가계부채가 계속 늘어난 데다 물가도 높았기 때문에 저축률이 1%대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축률

한국인의 돼지 저금통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저축을 많이 하는 국민’이라는 이미지도 더는 유효하지 않다.

가계저축률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3.2%에 이른 뒤 가파르게 하락해 2002년에는 2%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2004년 5.7%까지 저축률이 올랐으나 2007년 다시 2.3%로 낮아졌고 작년에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이에 따라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2007년 기준으로도 독일(10.8%) 프랑스(12.4%) 스위스(13.0%) 스페인(10.2%) 등보다 훨씬 낮고 초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일본(3.1%)에도 못 미친다.

2007년 4분기 0.4%까지 하락했던 미국의 가계저축률이 최근 오름세로 돌아서 올 1월에 5%까지 높아진 것을 감안하면 주요국 중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인의 저축률이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많다”는 비판을 받아온 미국인보다 낮은 수준이 된 것이다.

한국의 저축률은 낮을 뿐 아니라 하락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일본의 저축률이 지난 10년간 8%포인트 하락했지만 한국은 무려 20%포인트 넘게 급락했다. 같은 기간 독일은 10%, 프랑스는 12%의 저축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전통적으로 한국 경제는 가계가 돈을 예금하면 기업은 이 돈을 빌려 써 투자를 하고 성장을 하는 구조였다”며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가계의 흑자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저축을 거의 못하는 지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 기업은 돈 쌓고 가계는 빈곤

한국의 가계저축률이 곤두박질친 것은 소득은 완만히 증가한 반면 부채와 소비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저금리로 인한 부동산 투자열풍과 사교육비 부담이 중산층 이상 가계의 저축 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수많은 중산층 가구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면서 가계의 금융부채 규모는 2008년 말 800조 원을 넘어서며 10년 전의 3배가 넘는 규모로 늘어났다. 가계소비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6%에서 최근 12% 수준까지 크게 올랐다.

가계저축률의 급락세와는 대조적으로 총저축률(정부 기업 개인 등 모든 경제주체의 저축비율)은 하향세이긴 하지만 30%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100조 원대의 내부유보금을 마련하는 등 현금을 축적해 왔지만 가계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저축률이 낮은 것은 그만큼 소비지출이 활발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저축률 하락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가계는 소득에 비해 부채 부담이 너무 커 저축을 하고 싶어도 엄두를 못내는 게 문제다. 이 실장은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때는 개인들의 저축률이 낮더라도 소득이 늘고 부채상환능력도 여유가 있어 큰 문제가 안 되지만 지금처럼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상황에서는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사회 안전망이 크게 미흡한 점을 고려하면 저축률의 하락은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경기침체로 일자리를 잃거나, 집 등 보유자산의 가격이 크게 하락할 때 저축이 부족하면 정부의 지원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득계층별 가계저축률의 차이를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득을 기준으로 한국의 가계를 5등급으로 나눴을 때 상위 소득계층의 저축률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하위 소득계층은 ―10%를 밑도는 심각한 마이너스 저축률을 나타내고 있다. 저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적자 가계’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신 실장은 “취약계층인 저소득층의 저축률을 높이려면 일자리를 늘려 이들 계층의 소득을 안정시키고, 가계 부채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가계저축률(개인순저축률)

세금과 이자 등을 제외하고 개인이 쓸 수 있는 모든 소득(가처분소득) 가운데 소비지출에 쓰고 남은 돈의 비율을 말한다. 예금, 적금뿐 아니라 펀드 투자액도 저축으로 잡힌다. 가계저축률이 1%라면 월 100만 원을 벌어 소비에 쓰고 난 뒤 저축할 수 있는 여윳돈이 1만 원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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