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하지만 세상에 나쁜 분자는 없다

  • 입력 2009년 3월 2일 03시 00분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로얼드 호프만/까치글방

살상 무기를 만들기도 하는 화학… 하지만 세상에 나쁜 분자는 없다

서로 상반되는 성질을 동시에 가진 존재는 특별한 관심을 끈다. 몸에 좋은 인삼도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거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의 자식이라는 설정은 언제나 긴장감을 준다.

득일까 실일까를 따지는 심리는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기본자세이다. 내가 처음 접한 이 물질(또는 인간)이 독일 수도 약일 수도 있지만 독도 약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질문,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첫 출발이다.

화학자는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에 대해 ‘이것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그들은 분자의 특징을 알아내기 위해 ‘과연 이 안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그것들은 서로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를 밝히려 한다. 그런 점에서 화학자들의 작업은 마치 갓 태어난 쌍둥이를 구별하려는 엄마의 관심을 연상시킨다.

그 결과 화학자는 눈앞의 하얀 가루를 보면 이미 존재하는 100만 종류 이상의 하얀 가루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밝혀낸다.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 산소 같은 기체 분자의 비율을 알아내고 포도 없는 ‘포도음료’를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로얼드 호프만은 분자의 대칭성을 기초로 복잡한 분자의 성질과 화학반응을 규명하여 1981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다. 화학자로서는 특이하게 시집과 시화집을 발간했고 화학과 관련된 철학적, 미학적 논문을 쓰는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상반된 분야에 대한 관심과 특징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호프만의 관심은 말없는 분자들의 내부 메커니즘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분자들은 인간의 시선이 파악할 수 없는 물질의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다양한 방법으로 악수를 한다. 화학 기호는 그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번역이다. 화학책에서 볼 수 있는 분자식과 분자모형은 입체파의 그림이나 라스코 동굴벽화의 들소 그림 기법과도 유사하다. 화학논문은 딱딱한 기호 속에 수많은 의미를 숨겨놓고 읽히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화학은 시이자 그림이며, 예술적 창조성과도 상통한다고 호프만은 말한다.

호프만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구분하고, 인공적인 화학제품을 낮은 질(質)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왜 사람들은 실크가 나일론보다 더 좋다고 느낄까? 그는 그것을 낭만적인 감성, 지위의 표현, 진품 지향, 대량 생산 제품에 대한 싫증,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애착심이라고 분석한다. 화학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만나려는 그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호프만의 진실한 마음은 화학자의 역할을 논할 때 드러난다. 화학은 의복을 개선하고 식량 생산을 증가시켰고 수명도 연장시켰다. 화학 덕분에 특권층만이 누리던 안락함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호프만은 환경에 무관심하거나 과학의 결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화학자들을 비판한다. 1960년대에 유럽을 경악시켰던 탈리도마이드(1950년대 후반∼1960년대 임신부의 입덧 방지용으로 판매된 약)에 의한 기형아 대량 출산 사태나, 비료 생산을 위해 발견한 암모니아 합성법이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화약 개발로 이어졌던 끔찍한 역사를 꼼꼼히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상에 나쁜 분자는 없고 다만 부주의함이 있을 뿐이며, 악인도 없고 다만 인간이 있을 뿐이다.” 호프만의 화학에 대한 애정은 결국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통한다.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과학자’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이 과학의 시대 한복판에 선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 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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