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사업, 발들여놓지 않는게 상책”

  • 입력 2009년 1월 4일 22시 46분


서울 동작구에 사는 A씨는 2006년 투자처를 찾던 도중 친구를 통해 승강기용 모니터 대여 사업 설명회에 참여하게 됐다.

광고모델이 유명 탤런트인데다 이 사업의 대표 김모 씨가 유엔의 고위직 인사와 면담한 적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선뜻 550만 원을 투자했다. 일주일 뒤부터 배당금이 꼬박꼬박 들어오자 A씨는 투자금을 늘려갔다. 교육 받은대로 주변 사람들까지 사업에 적극 끌어들였다.

그러나 얼마 뒤 회사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다단계사업의 함정이 드러났다. 김 씨는 이러한 수법으로 약 1만9000회에 걸쳐 수천 명으로부터 투자금 389억 원을 모은 뒤 이를 가로챈 혐의(사기 및 유사수신행위) 등으로 기소됐다.

생활비조차 쪼들리게 된 A씨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형사재판을 지켜볼 수만 없어 재판부에 배상명령을 신청했다. 배상명령이란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할 때 피해자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피고인에게 명령하는 제도. 민사소송 비용이 없는 서민들이 손쉽게 피해배상을 받도록 만들어졌다.

법원은 최근 김 씨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A씨의 배상명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의 피해금액이 얼마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경기 침체 영향으로 한탕주의가 만연하면서 수조 원대의 대형 다단계 사기 피해가 잇따르고 있지만 대부분 A씨처럼 손해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4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의 배상명령 신청 건수는 6263건. 이 가운데 18.2%인 1082건만이 받아들여지고 나머지는 기각 또는 각하 처리됐다. 이 제도가 도입된 1981년 이후 배상명령 신청을 받아들인 비율은 20% 안팎에 머물러왔다.

법원이 배상명령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피해액이 명확하지 않거나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해 배상책임 여부와 그 범위가 명백하지 않고 △배상명령으로 형사 재판이 지연되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소극적인 태도도 문제다. 굳이 형사재판에서 골치 아픈 배상 여부까지 판단하기 꺼리는 것. 실제로 최근 속출하고 있는 수조 원대 다단계 사기 사건에서 배상명령이 받아들여진 것은 한 건도 없다.

그러나 다단계 사업의 경우, 구조상 피해액을 돌려받기 힘들어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단계 사업은 무한대로 투자가 이어져야만 사업이 유지돼 배당이 돌아가는 구조로, 피해액이 끊임없이 재투자되기 때문에 초창기 일부 투자자들을 빼곤 이익을 얻기 힘들다.

또 다단계 사업주가 투자금을 횡령하는 경우가 많아 초창기 투자자들조차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소송을 제기하곤 한다.

서울중앙지법 배기열 부장판사는 "다단계 참여자들은 타인에게 재투자를 권유하기 때문에 본인이 피해자면서 또한 가해자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다"며 "초창기 일부 투자자들을 빼곤 대부분 돈을 떼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아예 다단계에 발을 안 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이종식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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