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교과서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입력 2008년 11월 30일 20시 09분


경제학에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교과서가 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폴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학원론’(1948년)과 하버드대 그레고리 맨큐 교수의 ‘맨큐의 경제학’(1997년)이다. ‘경제학원론’은 “세계 경제학자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마련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이 아성을 무너뜨린 게 ‘맨큐의 경제학’이다. 영어판만 1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현재 17개 나라 대학생들이 전공 및 교양교재로 쓰고 있다.

두 책의 공통점은 ‘쉽다’는 것이다. 특히 ‘맨큐의 경제학’은 간결한 문장에 흥미롭고 풍부한 예시, 그리고 장(章) 끝부분마다 ‘복습’ ‘응용문제’까지 제시해 확인학습까지 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어렵고 딱딱한 경제학을 이처럼 ‘맛있게’ 공부하도록 도와주니 이보다 더한 지적(知的) 공헌이 없다. 교과서의 공헌은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크다.

교과서가 여타 책들과 다른 점은 해당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좋은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은 전문가 독자가 아니라 초보 독자들을 염두에 둔다. 맨큐 교수도 “장래의 경제학자가 대상이 아니라 대학 신입생과 경제학 비전공자들이 경제원리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교과서는 ‘한 사회의 공식적 지식 체계를 담는다’(복거일)는 점에서도 일반 책과는 다르다. 저자의 특정한 관점이나 주장이 아닌 여러 학설이 객관적으로 담겨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좌편향 역사 교과서들은 ‘쉽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부터 지키지 않고 있다. 물론 사회과학인 경제학 교과서와 역사 교과서를 같은 맥락에 놓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점유율 50%대인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관점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과제 제시’ ‘생각 열기’와 같은 요점 학습도 학생들에겐 너무 어려워 보인다. 내용도 어렵고 시각도 한쪽으로 치우친 교과서가 널리 읽힌다는 것은 학습의 시장(市場)이 이념적, 정치적 동기에 의해 왜곡돼 있다는 증거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교과서는 ‘뼈’이며 거기에 살과 피를 덧붙이는 일이 바로 작가와 학자의 몫”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만 해도 중고교 교과서에는 ‘권력정치를 추구한 현실 정치인’ 정도로 간단히 소개된다. 그 뼈에 차츰 피와 살이 붙어 수많은 마키아벨리 연구서가 나온다. 시오노도 500쪽에 달하는 마키아벨리 평전을 썼지만 마키아벨리 평전사(評傳史)라는 독립된 연구 분야가 생겼을 정도다.

공식적 지식체계로서의 뼈가 배우는 대상에 맞게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건강한 살과 피를 붙일 수 없다. 교과서 집필자는 그 뼈를 세우는 사람이다. 중고교 시절, 우리는 선생님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이 나오면 “차라리 너희들이 대학생이라면 쉽게 설명이 될 텐데…” 하면서 힘들어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순백의 도화지 같은 아이들을 상대로 뼈를 세우는 작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시오노의 말대로 뼈보다 살과 피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사보다 작가나 학자의 길로 나서는 게 옳다.

작금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장차 우리 아이들이 건강한 지식과 교양의 소유자가 될 수 있도록 골간(骨幹)을 세워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임을 명심해야 한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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