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금 스스로 벌고 휴대전화 지령

  • 입력 2008년 8월 28일 02시 57분


탈북자 신분 역이용 대북무역 벌여

‘김정일 친위’ 보위부가 양성

난수표 사용않고 신분 합법화

北말씨 익숙해진 남한서 활개

■ 달라진 간첩 양상

탈북 위장 여간첩 원정화 씨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거 남파 간첩 사건과 달랐다.

우선 원 씨를 남파한 주체가 기존의 조선노동당 35호실이나 조선인민군 정찰국 등이 아니라 국가안전보위부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북한 고위층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이 한국 내 요인 납치와 암살, 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할 남파 간첩을 양성하고 파견하는 조직은 조선노동당 내 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35호실, 작전부 등 4곳과 조선인민군 산하 정찰국 등 모두 5곳이다.

김정일 친위기구인 보위부는 국내(북한)에 침투한 해외 간첩과 내부의 체제불만 및 전복 세력을 색출하는 기관으로 원래 대남 간첩을 양성해 파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한 고위층 출신 탈북자는 “1990년대 이후 경제난 때문에 탈북자가 많아졌고 보위부는 이들과 연결된 국내 간첩이나 체제불만 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중국이나 한국 등으로 나간 탈북자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커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증언에 따르면 원 씨는 당과 군이 파견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남파 간첩이라기보다는 1990년대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된 북한이 내부 체제를 단속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해외 정보원’의 성격이 강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보위부 소속 원 씨의 행적 또한 과거와 달랐다. 과거 남파 간첩들은 외국인으로 국적을 세탁하거나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남한 사람으로 위장했다. 또 무전기와 난수표 등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물품을 이용했고 북한이 보내준 돈을 공작금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원 씨는 지난 10년간 남한 사회에 크게 늘어난 탈북자로 위장해 대북 무역사업을 벌였고 중국과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합법적인 사업을 통해 공작금을 스스로 벌어 썼으며, 난수표 대신 휴대전화로 지령을 받았다.

최근 10년 사이에 적발된 유일한 남파 간첩으로 2006년 7월 체포된 정경학(50) 씨는 태국인 등 동남아인으로 국적을 바꿔 침투했다. 그러나 원 씨는 자신을 중국동포라고 속여 한국 남성과 결혼해 입국한 뒤 탈북자로 위장 자수했다.

원 씨는 또 임신 7개월의 상태에서 잠입해 국내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공개적으로 활동했고, 탈북자 신분이라 북한 말씨를 쓰고 남한 사정에 어두워도 의심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원 씨는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남한의 일상생활에 밀착된 간첩이었던 셈이다. 10여 년간 대북 햇볕정책 등에 따른 남북화해 무드와 남한에 정착하는 탈북자 및 중국동포의 증가, 대북무역의 개방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의 변화를 충분히 이용한 것이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