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 숲 논술 꽃]‘나와 너’의 ‘너’를 잃어버린 현대인

  • 입력 2008년 6월 23일 02시 57분


타인과 인격적 만남 대신 돈-지위 등 우선… ‘나와 그것’에 집착

● 자아 잃은 오늘날 현대인은 고독하다

대중이 생산과 소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현대 시민 사회는 대중사회의 성격을 띠게 됐다. 주권자로서 국가와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대중은 그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됐다. 그러나 대중은 타인지향성과 익명성 속에 자신을 숨긴 채 행동하기도 한다. 이 때 대중은 비인격적 인간관계 속에 서로 간의 친밀감과 유대감을 상실한 채 고독감에 시달린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서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라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안이 나를 불렀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린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살이지요?"

"물론 그것이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나와 안, 그리고 아저씨로 통할 뿐이다. 딱히 이름을 알 이유도 없고 이름을 통해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도 없다.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하룻밤 묵게 된 여관에서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거짓 이름과, 거짓 주소, 거짓 나이와 직업을 쓰고 나란히 붙어있지만 각각 격리된 방으로 들어간다.

이 소설에 비친 인물들의 모습은 인간소외로 빚어진 인간관계의 단절을 보여준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작가는 상대방과의 소통을 배제하고 삶의 진정성을 상실한 채 고독하게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특히 같이 동행했던 사람이 죽자 애도하고 슬퍼하기보다 귀찮은 문젯거리가 될까봐 피해버리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하겠다. 이처럼 현대인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 각자의 삶 속에 숨어버리고 있기에 고독한 것이다.

● '나와 너'의 관계를 망각하고 있는 현대인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나',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너'의 '나'와 '나와 그것'의 '나'로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는 내가 세계에 대하여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나에게도 이중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곧 내가 '나와 너'로서 대하면 세계도 '나와 너'로서 다가오는 것이고 내가 '나와 그것'으로 대하게 되면 세계도 '나와 그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중략) '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위의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중략)

'그것'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모든 '물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경험 안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또는 발견되는 모든 '심리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인과의 계율로 간주된다. 그 중에서 어떤 목적 설정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들까지도 역시 '그것'의 세계에 연속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인과율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대인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나와 그것'의 세계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바쁜 현대인들은 대상의 고유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서로 길들이지 못한 채 아무런 의미 없는 그것의 존재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

●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 곧 '너'와의 접촉이다.

"넌 누구니? 참 이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여우야."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쓸쓸하단다." "난 너하구 놀 수가 없어. 길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 미안해." 조금 생각하다가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넌 여기 사는 아이가 아니구나. 무얼 찾고 있니?"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니?" (중략) "모두들 잊고 있는 건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란다." 여우가 대답했다. "관계를 맺는다구?" "응. 지금 너는 다른 애들 수만 명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내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구 나는 네가 필요 없구, 너는 내가 아쉽지도 않은 거야. 네가 보기엔 나도 다른 수만 마리의 여우와 똑같잖아?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워질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것이구, 네게도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될 거야."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그것은 비인격적 존재로서 애정이나 관심과 거리가 먼 '돈, 사회적 지위, 효율성' 등의 조건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익명의 존재로 남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이름을 기억해야 하듯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하나의 존재감을 갖게 하려면 '그것'이 아닌 '너'로서 상대를 마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은정 ㈜엘림에듀 집필위원·엘림에듀 대치 직영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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