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소방관, 악몽에 떤다

  • 입력 2008년 5월 27일 02시 58분


3명중 1명 ‘외상후 스트레스’ 고위험군

끔찍한 장면 자주 목격-화재 속 목숨 건 작업 등 원인

방재청 첫 실태조사… “美-日 수준 치료모델 만들 것”

경기소방재난본부 소방관 A(37) 씨는 요즘도 과거의 충격적인 사고 장면을 잊지 못한다. 2004년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서 열흘 사이에 3명의 투신자살 사고를 처리한 뒤부터다.

소방관 생활 9년째인 그는 “죽을 맛이었다. 비슷한 유형의 사고 얘기만 들리면 두렵고 떨린다. 악몽도 자주 꾼다”고 말했다.

이천소방서 소방관 B(45) 씨도 마찬가지. 올해 초 4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냉동창고 화재 현장에 투입된 뒤 “이제 무서워서 불을 못 끄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소방관 외상 후 스트레스 심각=국내 소방관 10명 중 1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PTSD)’에 시달린다. 3명 가운데 1명은 PTSD 고위험군으로 세심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화재 진압이나 구조작업 과정에서의 충격적인 경험이 원인이다.

소방방재청이 아주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소방공무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실태 분석 연구’ 보고서의 내용이다. 전국 소방공무원 2만9549명 중 5145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설문 응답자 4090명 중 1504명(36.8%)이 PTSD 고위험군으로 나왔다. 고위험군은 방치할 경우 PTSD 환자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고위험군 소방관은 저위험군에 비해 소화와 심혈관계 장애, 통증과 불면 증상을 훨씬 많이 경험한다.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은 극소수=경기소방재난본부는 지난해 10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PTSD에 대한 본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했다.

41개 병원과 협약을 체결해 소방관이 비공개로 상담이나 치료를 받도록 했다.

응답자의 35.9%는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근무 연한이 20∼29년인 소방관은 40.9%가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서비스를 이용한 소방관은 6.2%뿐이었다.

▽5명 중 1명이 심각한 부상 입어=소방관 가운데 처참한 시신을 목격하거나 수습했다는 비율은 83.7%, 사고 희생자나 환자가 죽는 모습을 봤다는 비율은 80.0%였다.

생명의 위협이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비율도 81.9%나 됐다. 실제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큰 부상을 당한 소방관은 22.8%였다.

가장 외상으로 남는 경험을 묻는 질문에는 21.1%가 ‘처참한 시신의 목격이나 수습’을 꼽았다. 다음은 생명의 위협이나 부상에 대한 두려움(20.5%), 사고 희생자 혹은 환자의 죽는 모습(19.7%).

소방방재청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PTSD 예방 및 치료 모델을 개발하기로 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중앙 및 지방 본부마다 미국 일본 수준의 재난스트레스센터를 만들 계획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충격적인 경험이나 심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은 뒤 이 기억을 반복해 떠올리는 상태가 계속되는 정신과적 질환이다. 미국정신의학회가 1980년 불안 장애의 범주에 속하는 정신질환으로 인정하고 공식 병명으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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